[한마당-박병권] 과거제도
입력 2012-11-29 18:45
조선시대에도 오늘날처럼 청운의 꿈을 품은 젊은 선비들이 관리 등용문인 과거시험장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제대로 공부는 하지 않고 과거시험에 쓰이는 문체인 과체의 기예만 배운 선비 같지 않은 선비로 들끓는다고 북학자 박제가가 한탄할 정도였다. 명저 ‘북학의(北學議)’에 따르면 시골의 과거시험에도 보통 1000명이 넘게 모였고, 서울의 대동과에는 수만 명까지 모였다고 한다.
그러니 반나절에 합격자 방을 내걸기 위해 채점을 대충할 수밖에 없었다. 문장가 소식(蘇軾)이 답안지를 내더라도 알아보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비꼬았다. 실제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정조 24년 3월에 치러진 경과정시(慶科庭試)에는 11만여명이 모였고, 곧이어 치러진 인일제(人日製)에는 10만여명이 모여 거둬들인 시권만 각각 3만장 이상이었다.
과거(科擧)란 시험 종류인 과목(科目)에 따라 거용(擧用)한다는 뜻이다. 근대국가 이전 관리로 채용할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실시한 시험으로 한(漢)나라 때부터 시작됐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원성왕 4년(788)에 실시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가 최초다. 이후 고려 때 자리를 잡아 소수 정예의 인재를 선발해 전원 관리로 채용했기 때문에 선망의 대상이 됐다.
동양적 관료선발 방식인 과거제도는 신분에 따라 벼슬을 물려받는 귀족사회의 잔재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혁명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능력위주의 선발 방식이라 관료제의 정착을 가져왔으며 학문을 장려하는 풍토를 조성하는 데도 이바지했다. 문제가 없지는 않았지만 조선 후기 이전까지는 그런대로 인재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과거제도의 현대판인 사법시험도 법조계 진출의 관문으로 이 나라 젊은이들의 청춘을 불사르게 했다. 오로지 연필 한 자루와 법서만으로 이 시험에 운명을 맡겼다. 대략 2∼3년을 집중 투자하면 합격의 영광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고시촌의 정설이다. 그러나 로스쿨 도입으로 2017년까지만 매년 500명을 선발하고 그 다음해 완전히 폐지될 운명에 처했다.
최근 검사들의 잇단 탈선으로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이 무척 시끄럽다. 로스쿨 출신 검사도 비행의 한 당사자라 일부에서는 사법시험을 대신한 로스쿨제도의 문제점도 제기하고 있다. 어쨌든 이제 우리도 고급 공무원의 충원방식을 한번 재고해 볼 때는 된 것 같다.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는데도 공무원의 비리가 좀처럼 줄지 않고 더욱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