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신창호] 안철수의 신선한 피

입력 2012-11-29 18:36


정치학자들이 현대 민주주의 정치를 논할 때 자주 사용하는 용어 중 하나가 ‘호모 오빌리투스(Homo Obilitus·망각하는 인간)’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뭔가를 잊어버리는 인간의 기억력 덕분에 수많은 공약을 내놓은 정치인들이 선거무대를 평정하고 자신의 정치생명을 연장해간다는 주장이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정치는 더 이상 ‘사회 구성원의 다양한 이해갈등을 조정하는 필수요소’라는 본분을 잃고, 정치인 역시 유권자들로부터 한낱 ‘천박한 직업 종사자’ 정도로 취급받게 된다.

지금까지의 우리 정치 역시 이런 평가에서 한 치도 벗어남이 없었다. 중요한 선거가 닥치면 정당과 후보들은 온갖 장밋빛 약속을 늘어놓고 막상 당선이 되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거나 “우선순위가 있다”는 이유로 그 약속들을 내팽개쳐 왔다.

그런 우리 정치사에서 정말 찾아보기 드문 일이 6일 전 벌어졌다. 지난해 10월 28일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부터 1년 이상 ‘2040’세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안철수 전 무소속 대통령 후보가 급작스레 18대 대선 후보 사퇴를 발표한 것이다.

야권 후보 가운데 가장 당선권에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그는 특유의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얼굴로 “대통령 당선보다 제가 했던 약속이 더 중요했다”고 사퇴의 변을 털어놨다.

안 전 후보의 사퇴를 놓고 정치권에서는 손익계산에 분주한 모습이다. 그가 이끌던 무당파·중도 성향의 젊은 유권자 표심이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게 갈 것인지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에게로 향할 것인지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어떤 이들은 “저리 마음이 약하니 안철수는 아마추어”라고, 다른 이들은 “질 것 같으니까 그만둔 게 아니냐”고 손가락질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안 전 후보의 주요 지지층인 2040세대들은 전혀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듯하다. 기존 정치인들로부터 단 한 번도 약속의 중요함을 느껴보지 못했는데 안 전 후보는 전혀 달랐다는 평가다. 야권 후보 단일화라는 자신의 약속이 깨질 위기에 봉착하자 스스로 몸을 던진 그에게서 ‘감동’을 느꼈다고 반응하고 있다. 사퇴 발표문을 읽으며 막 울음이 터질 듯했던 안 전 후보의 얼굴을 보면서 그동안 그가 겪어야 했던 기성 정치의 벽을 실감하게 됐다는 감상평도 있고, 안철수야말로 ‘신선한 피’라는 평도 나온다.

안 전 후보는 18대 대선전 무대에서는 사라졌지만 새로운 정치 지평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바로 자신을 ‘새정치’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주는 견고한 지지층을 갖게 됐고, 이들은 끊임없이 ‘여의도 정치’의 혁파를 원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 가운데 누가 차기 대통령에 오른다 하더라도 안 전 후보는 향후 정계개편의 ‘태풍의 눈’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어쩌면 안 전 후보가 아직까지 문 후보를 지지하느냐 마느냐에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것도 대선 이후 구상에 골몰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치권 전체를 허물겠다는 야심을 꺾었을 리가 없고 이를 위해서는 정치권 바깥에서 머물며 이번 대선전 실패 원인을 차근차근 되새김질하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정중동(靜中動)의 자세로 정치개혁 실천동력을 얻겠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가 대선 이후에도 ‘안철수 개인’으로 남는다면 ‘진짜 아마추어’로 전락하게 될 것이고 호모 오빌리투스인 우리들은 그를 영원히 망각할 게 자명하다.

신창호 정치부 차장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