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희성] 경청

입력 2012-11-29 18:38


예전에 통번역대학원에서 토론수업을 받았다. 1학년 전체 학생을 무작위로 섞어 조를 나눈 뒤 공개토론을 하고 평가하는 수업이었다. 토론 과제와 찬성·반대조를 정한 뒤 조원끼리 역할을 나누고 기본적인 주장과 근거, 각국 사례, 상대팀 주장에 대한 반박 질문, 상대팀 반박 질문에 대한 방어 등을 1주일간 준비한 후 토론에 임했다.

오래전 일이라 상세한 토론 내용이나 결론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다. 다만 방청객이었던 한 학생의 평가만큼은 또렷하게 기억난다. “제가 교수님이라면 두 조 모두 0점을 주겠습니다.” 100여명의 시선이 그와 교수님 사이를 오가며 다음 전개에 대한 흥미와 긴장감에 숨죽인 채 반짝이고 있었다.

조용히 이유를 묻는 교수님의 질문에 그는 답했다. “단 한명도 상대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질문을 하고도 답변자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고 다음 질문을, 아니 공격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묻고도 듣지 않는 사람도, 듣거나 말거나 자기 할 말만 하는 사람도 모두 토론자로서 자격 미달이고 0점입니다.”

매섭게 정확한 지적이었다. 학점을 잘 받으려고 열심히 준비했으나 막상 토론이 시작되니 유치한 승부욕으로 변질됐다. 상대방 답변은 또 다른 반박을 위한 먹잇감일 뿐이었다. 마음속에 내 할 말만 가득해 상대의 말이 들어올 작은 틈조차 없었다. 상대의 말실수에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었고 말문이 막힌 상대를 보며 이겼다고 통쾌해 했으니 그의 채점에 이의를 제기할 염치조차 없었다.

미국의 전 국방장관인 딘 러스크는 타인을 설득하는 최상의 방법은 말을 경청해 귀로 설득하는 것이라고 했다. 토론의 목적은 설득이다. 그러니 최고의 토론기술은 귀 기울여 듣는 것인 셈이다. 사람은 상대가 내 의견을 충분히 이해했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비로소 마음을 열고 그의 의견을 듣는다.

야권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경청과 소통이 떠올랐다.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그를 지지하는 국민의 목소리를 듣는 것과 같건만 누군가는 듣지 않았고 누군가는 듣게 하지 못했다. 곧 대권 후보들의 미디어 토론이 시작될 것이다. 용기는 일어나 말할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앉아서 들을 때도 필요하다고 하지 않던가. 용기 있는 후보는 들을 줄 아는 사람이다. 겸양과 절제의 힘으로 듣는 사람이다. 그런 후보는 TV 앞에 앉은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경청은 사람의 마음을 여는 가장 효과적인 열쇠다.

김희성 (일본어 통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