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미적 충동’을 따라가는 여행… 산문집 ‘불행보다 먼저 일어나는 아침’ 낸 이윤학 시인

입력 2012-11-29 18:24


“나는 내가 없는 곳으로 가서 살고 싶은 사람이다. 내가 없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미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언제나 구경꾼이기를 바란다. 나는 나를 들키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쓴다. 그래서 나는 글을 옮길 때에도 언제나 관찰자가 되려고 한다.”(29쪽)

여기 자신은 사라지고 없는 곳에서 세상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관찰자로 살고 싶은 시인이 있다. 스물다섯 살에 등단, 어언 20여년의 시력에 이르는 동안 여덟 권의 시집을 펴내며 이미지즘의 촉각을 세워온 이윤학(47) 시인은 청년 시절부터 떠돌이였다. 자신만의 미학을 추구하기 위해서도, 좋은 시 한 편을 건지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산문집 ‘불행보다 먼저 일어나는 아침’(문학의전당)은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며 생래적 슬픔의 소유자로 살아온 시인의 방황과 열정이 속 깊은 우물처럼 웅얼거린다.

1992년 첫 시집 ‘먼지의 집’을 냈을 때의 일이다. 그는 학창 시절에 사귀던 여자를 만나기 위해 부산에 내려간다. “아무래도 태종대 자살바위에서 그녀를 만나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벌써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환상을 만들고 깨기를 반복했지만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약속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난 사인해간 첫 시집을 바다 속으로 밀어 넣었다.”(표제 산문)

그토록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서도 정작 준비해간 시집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말았다는 청년 이윤학은 뭇 시인들이 그렇듯 충동적이고 자기 파괴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점차 그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철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소설을 쓰겠다고 한겨울에 올라간 서울 평창동의 낡은 원룸. 푸른 호스를 연결해 2층까지 물을 끌어다 욕탕에 물을 채우면 귀뚜라미 시체가 떠오르던 그곳에서 그는 한 철을 났다. 노란 스쿠터를 타고 다니던 시절이었는데 어느 날 슈퍼 앞에 세워진 스쿠터가 없어지고 말았다. 안장의 먼지를 닦아 시커멓게 변한 수건과 주머니 속 스쿠터 키를 만지작거리며 그는 중얼거린다. “언젠가 네가 서 있던 방앗간 앞 버스정류장. 너로 인해 버스정류장 근처는 눈부셨다. 내 마음은 방앗간 핏대를 돌려 고춧가루를 만들었다. 나는 네가 없는 자리에 투명한 너를 세워놓았다.”(‘네가 서 있는 자리’)

원룸을 전전하며 살아온 그가 들려주는 에피소드는 슬퍼서 아름답다. 또 다른 원룸에서 살 때의 이야기다. 그는 위성안테나를 떼기 위해 옥탑지붕에 올라갔다가 떨어져 허리를 다친다. 119구급차에 실려가 CT 촬영을 하는 동안 그는 살아온 삶을 반성하기에 이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현재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나. 내 아픔을 온전히 나 혼자서 책임져야 할 때가 되어서야 그것을 알았다. 나는 얼마나 관념적으로 아팠나, 나는 또 얼마나 엄살을 피웠나. 그동안 내가 누렸던 행복은 모두 거짓이었다.”(‘허리’)

산문집엔 문학적 치기로 충만했던 청년 시절에서부터 중년의 뒷모습에 이르기까지 그를 통과한 녹록지 않은 사연들이 고개를 치켜들고 있다. 이윤학은 ‘작가의 말’에 썼다. “언제부턴가 원룸을 옮겨 다니며 글을 쓰게 되었지요. 방충망의 모눈 한 칸으로 에델바이스가 핀다는 산정을 바라보았지요. 내가 모르는 곳에 나를 두고 나와 함께 살아가는 꿈을 꾸었지요. 산정을 향해 불러본 내 이름…. 그건 불면의 밤을 함께해준 또 다른 당신의 이름이었습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