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그 후 26년, 눈물이 분노가 되어 ‘그 사람’을 겨누다… 강풀 동명 만화 영화화 ‘26년’ 개봉

입력 2012-11-28 18:18


‘탕!’ 마지막 한 발의 총성이 울린다. 5·18 광주 비극의 주범인 ‘그 사람’을 겨냥한 사격이다. ‘그 사람’은 현실에서는 살아 있지만 영화에서는 이 한 발의 총성으로 역사의 심판을 받은 셈이다. 1980년 5월 18일 촉발된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최고 지휘자에 대한 복수를 담은 영화 ‘26년’(감독 조근현)은 그 복수가 역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준다.

계엄군이 점령한 광주의 참혹한 모습을 애니메이션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방안에서 창문을 통해 날아든 총탄에 어머니를 잃은 미진(한혜진), 야산의 무수한 시체 더미 속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한 진배(진구), 광주 금남로에 함께 있다가 계엄군 총탄에 누나를 잃은 정혁(임슬옹) 등 광주 영령 아들딸들의 눈물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술로 세월을 보내던 미진의 아버지는 ‘그 사람’의 저택에 접근해 방화를 시도하다 결국 자기 몸에 불을 붙여 숨을 거둔다. 진배의 어머니는 남편의 처참한 시신을 발견한 후 정신을 반쯤 놓고 살다 병원에 입원한다. 훗날 경찰이 된 정혁은 ‘그 사람’의 차가 지나갈 때 신호등을 초록색으로 바꿔주는 교통 업무를 맡고선 죽은 누나를 생각하며 오열한다.

아버지가 죽은 후 국가대표 사격선수의 꿈을 접은 미진과 광주의 조직폭력배로 살게 된 진배, 그리고 자괴감에 빠져 있는 정혁 앞에 5·18 당시 계엄군이었던 김갑세 회장(이경영)이 나타나 ‘그 사람’을 암살할 것을 제안한다. 이들을 의기투합하게 만든 것은 잠깐 감옥에 들어갔는가 싶더니 금세 출옥하고, 재산 추징 요구에는 “통장 잔액이 29만원”이라고 답한 ‘그 사람’에 대한 분노다.

강풀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등장인물 개개인의 캐릭터와 갈등 구조를 재현해 극적 긴장감을 불어넣는 데 성공한다. 특히 서울 시내 도로에서 승용차를 타고 가는 ‘그 사람’을 향해 1차 암살 시도를 다룬 장면이 볼만하다. 하지만 소름이 돋을 정도로 치밀한 구성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을 보여준 원작에 비해 다소 평면적이어서 아쉽다.

만화 속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낸 데는 배우들의 연기가 힘을 보탰다. 복수에 대한 집념으로 강렬한 눈빛 연기를 보여주는 한혜진(31), 강하면서도 여린 캐릭터의 진구(32)는 5·18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지만 진정성을 담은 연기로 관객의 마음을 울린다. ‘그 사람’의 실존 인물을 완벽하게 해낸 장광(60), 5·18에 대한 죄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재벌 총수 역의 이경영(52)은 ‘빛나는 조연’이다.

5·18 광주의 비극이라는 가까운 현대사와 실존 인물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4년간 제작비 투자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여러 배우가 출연을 꺼리기도 했다. ‘그 사람’에 대한 살해 작전을 제안한 김갑세의 대사를 통해 영화는 질문한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사과를 스스로 하면 좋겠지만 안 되면 강제로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

‘26년’은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을 다룬 ‘남영동 1985’(감독 정지영)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26년’이 1980년대 신군부의 무자비한 폭력성을 그렸다면 ‘남영동…’은 민간에 대한 권력의 압력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두 영화를 두고 보수·우익과 진보·좌익의 평가가 엇갈리는 것을 보면 아픈 역사는 치유되지 않고 아직 현재진행형이라는 현실을 들여다보게 한다. 29일 개봉. 15세 관람가.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