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 명예의 전당’ 헌액된 원로 배우 엄앵란 “열아홉 살 데뷔 시절 가장 행복”
입력 2012-11-28 21:26
“스물세 살 때 처음으로 해외에 나갈 기회가 생겼어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영화제’였지요. 한국을 대표해 나가는 건데 의상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죠. 저는 하늘색 공단 한복을 입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뭔가 특색이 있어야겠다 싶어 병풍 자수 놓는 사람에게 수를 놓아 달라고 했어요. 한복에 자수 넣어 입었던 건 제가 처음이었을 겁니다. 그 한복도 이번에 기증하게 됐습니다.”
‘은막의 스타’ 엄앵란(76). 여전히 아침 프로그램에서 영화배우 남편 신성일(75)의 흉(?)을 보는 중년 아줌마 같지만 사실 그는 팔순이 가까운 우리시대의 원로 배우이다. 이런 그가 28일 경기도 남양주 종합촬영소 내 ‘영화인 명예의 전당’에 다섯 번째 입성자가 됐다. 신상옥 유현목 황정순 김지미에 이어 다섯 번째다.
이날 오후 한국영화복지재단·영화진흥위원회 주관 헌액식(獻額式)에 참석한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 같은 영광이 어딨겠느냐”며 “너무 감사해 내가 없어져도(죽더라도) 나를 사랑한 팬들께서 즐기라고 제가 쓰던 소품 70여점을 내놨다”고 말했다. 하늘색 비단 한복은 그가 이번에 내놓은 소품 중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당시 해외 나간다는 건 특별한 사람이나 가능했지요. 지금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건물 앞 비행장에서 출국했어요. 입·출국 수속하던 곳이 생철(양철)지붕으로 돼 있었죠. 모두가 가난했지요.”
헌액식에서는 엄앵란의 동상이 공개되고 핸드백과 같은 애장품, 스케줄 노트 및 도록집, 영상기록물 등이 함께 헌액됐다. 1962년 11월 14일 신성일과 한국영화사의 ‘세기의 결혼’을 한 서울 워커힐호텔 결혼식 후 입었던 ‘나이트 가운’도 품목에 들어 있다. 고(故) 앙드레 김 작품이라고 했다.
명예의 전당 선정위원회는 “전쟁과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20세기 후반의 불안한 시대상황 속에서 영화로 젊은이들의 새로운 감성을 보여주고, 이후 사랑과 헌신의 어머니 역으로 한국영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을 높이 샀다”고 평했다.
엄앵란은 영화인으로 56년간을 살았다. 1956년 영화 ‘단종애사’에서 ‘정순왕후’로 화려하게 데뷔한 뒤 청초한 이미지로 60년대 한국영화의 청춘스타로 떠올랐다. 신성일과 함께 ‘맨발의 청춘’ ‘동백아가씨’ 등 수많은 영화에 황금의 콤비로 출연하며 인기를 끌었다. 이날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중간 중간 지긋하게 눈을 감고 흑백필름 돌리듯 세월을 반추했다.
“영화배우로 데뷔하던 열아홉 살 무렵이 가장 행복했어요. 세상을 많이 아니까 욕심이 생겼고 그럴수록 불행해지더군요. 인생이 풀잎의 이슬 같아요. 이를 실감 못하고 살았죠. 즐기지도 못했고요. 바위틈의 이끼도 찬찬히 보고 살았어야 했는데 바쁘게만 살아왔어요. KTX 타면 휙 지나가 선(線)만 남죠? 그렇게 빠르게 지나죠. 청년들이 알아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반세기를 같이 산 ‘최고의 미남’ 남편 신성일은 그의 삶에서 어떻게 자리하고 있을까? “혹사당하고 산 사람이죠. (영화에 몰입하느라) 청춘을 잃어버린 사람? 그 보상 심리에서 반항(신성일의 ‘외도’ 고백 등)도 하고 그러는데 마음과 몸 고생이 심하죠. 제가 무어라 안 해요. 이 나이 됐는데 자유인으로 놔두어야죠.”
소망을 물었다. “한 시간 지나는 것조차 아까워요. 식구끼리 여행 많이 하고 있어요. 자선도 할 만큼 했으니 식구 챙겨야죠. 너무 바쁘게만 살았어요. 바쁘게만….”
엄앵란은
본명 엄인기. 서울 출신. 함경북도 출신 부잣집 아들이었던 아버지는 일본 도쿄음악학교 출신이고 어머니는 최승희 무용단 무희였다. 어머니가 배우로 활동하던 1956년 영화 ‘단종애사’에 캐스팅돼 데뷔했다. 숙명여대 가정학과 출신이어서 ‘학사배우’라는 별칭이 따라 붙었다. 고학력자 배우가 드물던 때였다.
60년대 초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에서 신인 배우 신성일을 만났고, 이후 영화사상 전무후무한 콤비스타를 이뤄 결혼까지 이어졌다. 60년대까지 160여 편의 청춘멜로물을 남긴 영화계의 ‘신데렐라’였다.
그러나 2000년 남편이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치인이 되면서 결국 남편 옥바라지까지 하는 등의 곡절을 겪었다.
지금은 TV프로그램 게스트로 출연, 여자의 속내를 잘 대변해 주는 ‘속 시원한 친정어머니’ 같은 캐릭터로 인기를 얻고 있다. 아들 강석현이 연기자로 활동 중이다.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