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슬로시티… ‘느림의 미학’을 걷는다] (⑤·끝) 대흥슬로시티 & 조안슬로시티
입력 2012-11-28 18:26
세월 속에서 낚은 ‘흑백의 추억’
대흥슬로시티 (충남 예산)
대흥슬로시티는 옛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진한 형제애를 보여주었던 ‘의좋은 형제’ 이야기의 실제 무대인 충남 예산의 예당호변에 위치하고 있다. 예산군과 당진군의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1964년 완공된 예당호는 중부권 최대의 저수지. 면적이 서울 여의도의 3.7배인 9.9㎢로 둘레는 마라톤 풀코스와 맞먹는 40㎞.
저수지에 뿌리를 내린 버드나무 군락이 멋스런 예당호는 이른 아침 잔잔한 수면에서 피어오른 물안개가 저수지 주변을 솜이불처럼 포근하게 감싸는 동틀 무렵이 가장 환상적이다. 아침 햇살이 쏟아지면 푸르스름한 물안개는 화염처럼 활활 타오르며 수면을 미끄러진다. 요즘은 청둥오리를 비롯한 겨울철새들이 낚싯줄을 드리운 채 세월을 낚고 있는 강태공 주변을 맴돌며 노련한 사냥술을 자랑한다.
여느 슬로시티와 달리 대흥슬로시티는 주민이 주인인 마을이다. 기자생활을 하다 낙향한 슬로시티 사무국장 박효신(65)씨가 주민 15명을 생태문화해설가로 양성한 후 함께 개발한 흙물감 만들기와 그리기, 자연밥상 체험, 미니여행북 만들기는 도시인들에게 인기. 최근에는 체험료 수입으로 황토집 2채를 짓는 등 힐링타운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내포지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정겨운 농촌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마을의 속살을 보고 느끼려면 3개의 산책로로 이루어진 느린꼬부랑길을 걸어야 한다. 1코스인 옛이야기길은 약 5.1㎞. 슬로시티 방문자센터에서 관록재들을 향해 마을길을 걷다보면 수령 1300년이 넘는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나그네를 맞는다. ‘배 맨 나무’로 불리는 느티나무는 소정방이 나당연합군을 이끌고 임존성을 공격할 때 배를 타고 와서 묶어 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나무.
봉수산 임존성에 주둔한 백제부흥군에게 보급품을 수레로 날랐다는 임존성 수레길과 피톤치드 그윽한 봉수산 소나무숲길, 그리고 봉수산 자연휴양림은 마을 전경과 예당호가 한눈에 보이는 명소. 험준한 협곡을 틀어막아 만든 여느 저수지와 달리 예당호는 산과 물이 이웃처럼 다정하다. 고만고만한 높이의 산줄기들이 저수지를 향해 키를 낮추는 모양새가 예산 사람들의 넉넉한 심성을 닮았다고나 할까. 이곳에서 낙엽이 융단처럼 깔린 비포장 숲길을 걸어 다시 마을로 내려오면 대흥동헌과 ‘의좋은 형제’로 유명한 이성만 형제의 효제비가 나온다.
조선 세종 때 이곳에서 살던 이성만·이순만 형제는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좋기로 소문나 연산군 3년에 후세의 모범이 되도록 조정에서 ‘이성만 형제 효제비’를 건립했다고 전해온다. 1978년 발견된 효제비는 예당저수지가 축조되면서 수몰 위기에 처하자 대흥면사무소 앞으로 옮겨져 후세에게 우애의 본이 되고 있다.
2코스 느림길은 4.6㎞로 고즈넉한 숲길과 예산∼홍성을 오가던 보부상들이 다니던 보부상길로 이루어져 있다. 대흥향교 앞에 위치한 수령 600년의 거대한 은행나무는 상생을 상징하는 나무. 신기하게도 은행나무 줄기가 갈라지는 곳에 느티나무가 뿌리를 내려 한 그루처럼 보인다. 바람에 날려온 느티나무 씨앗이 은행나무 줄기에 뿌리를 내린 것으로 두 나무가 하나로 사는 모습이 의좋은 형제를 연상시킨다. 사랑길로 불리는 3코스는 교촌리 들녘을 한 바퀴 도는 3.3㎞ 산책로로 걸음걸음마다 시골마을의 정감이 듬뿍 묻어난다.
◇여행메모
당진대전고속도로 예산수덕사 나들목에서 내려 무한천을 따라가면 예당관광지가 나온다. 40㎞에 이르는 예당호 둘레길은 드라이브를 즐기기에 좋다. 예당호 주변에는 민물고기를 갈아 만든 어죽과 시래기를 넣어 끓인 붕어찜 전문 음식점들이 많다. 직접 먹거리를 채취해 함께 요리해서 먹는 슬로시티협의회의 자연밥상도 인기.
예당호 주변에는 전망 좋은 펜션과 모텔을 비롯해 대흥슬로시티협의회에서 운영하는 마을회관과 시골민박집도 몇 곳 있다. 봉수산 자연휴양림은 숲속의집 12동과 산림문화휴양관, 세미나실, 쉼터데크, 족구장 등을 갖추고 있다. 매달 둘째 토요일에는 의좋은형제공원에서 장터도 열린다(대흥슬로시티협의회 041-331-3727).
예산=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
조안슬로시티 (경기 남양주)
북한강과 남한강이 두물머리에서 만나 한강으로 이름을 바꾼 후 처음으로 만나는 강마을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의 능내리. 조안(鳥安)은 ‘새가 편안하게 깃든다’는 곳으로 남양주 슬로시티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서울의 배후도시로 상수원보호구역과 그린벨트로 묶여 개발이 제한되는 불편을 겪었으나 오히려 그 불편함 때문에 수도권 유일의 슬로시티라는 영예를 안았다.
남양주 조안슬로시티 여행은 구팔당역에서 북한강철교까지 중앙선 폐철로 구간을 달리는 남한강자전거길을 걷거나 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녹슨 기찻길을 사이에 두고 시멘트로 포장된 자전거길은 터널과 강변을 달려 260m 길이의 봉안터널을 빠져나오자마자 추억의 간이역인 능내역으로 진입한다.
먼 기적소리와 함께 기차가 떠나버린 능내역은 한동안 고독의 대명사로 남았었다. 켜켜이 먼지만 쌓여가던 능내역 일대가 다시 활기를 찾은 것은 남한강자전거길이 지나가면서부터. 역사 앞에는 기차카페가 들어서고 능내1리 주민들로 구성된 마을기업이 간이음식점과 자전거대여업을 하면서 더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이장을 비롯한 주민들의 흑백사진 몇 장이 걸려 있던 능내역사는 지난 9월 고향사진관이 문을 열면서 간이역 시절보다 더 분주해졌다. 빨간 우체통이 인상적인 능내역 안팎에는 길게 늘어진 줄에 누렇게 퇴색된 흑백사진이 수십 장 매달려 있다. 추억을 찾아 나선 이들이 고향사진관에서 추억의 교복과 교련복을 입고 찍은 사진들이다.
고향사진관 주인은 역장을 자청하는 포토그래퍼 이명환(49)씨. 마을주민과 나그네들의 추억이 서린 역사를 그냥 방치하는 것이 안타까워 재능기부 차원에서 역사에 스튜디오를 꾸미고 찾아오는 방문객들에게 추억의 흑백사진을 찍어 주고 있다. 무쇠난로가 후끈후끈한 역사 안에는 열차시각표, 제2차 세계대전 때 썼던 종군기자의 카메라도 전시돼 있다.
능내역 앞은 조선시대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이 태어나고 말년을 보낸 곳. 다산은 자찬묘지명에서 ‘이 무덤은 열수 정약용의 묘이다’라고 했다. 열수(洌水)는 한강의 옛 이름으로 능내리에서 태어난 다산은 한강을 무척이나 사랑해 자신의 호로 ‘열수’를 자주 사용했다.
다산은 조선을 대표하는 실학자로 1801년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유사화에 연루돼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목민심서 등 500여 권의 책을 저술한 인물. 다산의 생가가 있던 다산유적지에는 복원한 생가 ‘여유당’과 소나무가 병풍처럼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부부 합장묘를 비롯해 기념관, 사당, 실학박물관 등이 들어서 있다.
‘서둘러 고향마을 도착해보니/ 문 앞에는 봄 강물이 흐르는구나/ 기쁜 듯 약초밭둑에 서고 보니/ 예전처럼 고깃배가 보이누나…’
다산은 귀양지인 강진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기쁨을 ‘환초천거(還苕川居)’라는 시로 남겼다. 그가 기쁜 듯 서있던 약초밭은 한강변 실학생태동산의 다산채마원으로 거듭났다. 소내나루가 있던 실학생태동산은 강 건너 하남의 용마산 등이 한눈에 들어오는 소내나루 전망대를 비롯해 데크, 억새길, 산책로, 숲, 연못 등이 정갈하면서도 소담스럽게 꾸며져 한두 시간 다산의 실학정신을 음미하면서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여행메모
서울에서 6번 국도를 타거나 청량리역에서 중앙선전철을 타고 팔당역이나 운길산역에서 내린다. 덕소역∼팔당역∼능내역∼운길산역에 이르는 16.7㎞ 길이의 트레킹 코스 ‘한강나루길’은 영화 속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 절경의 연속. 능내역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고 달려도 좋다.
한강변에 위치한 남양주의 조안면은 유기농업이 발달했다. 유기농쌈밥은 조안슬로시티를 대표하는 슬로푸드, 영화 서편제와 쉬리 등을 촬영한 남양주종합촬영소, 능내연꽃마을 등이 볼거리. 운길산 중턱에 위치한 수종사에 오르면 강 건너 두물머리를 비롯해 조안면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남양주 희망마을팀 031-590-2099).
남양주=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