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 사상 첫 ‘찾아가는 법정’ 전남 고흥군 현장을 가다] 판사들 배타고 현장 검증… 해녀 출석해 증언

입력 2012-11-26 22:05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사건 당사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기 위해 서울에서 380㎞ 떨어진 전남 고흥까지 내려가 재판을 열었다. 재판부가 관할 법원을 벗어나 재판을 열기는 64년 한국 사법사상 처음이다.

서울고법 민사8부는 26일 “방조제 설치 후 어업 피해를 입었다”며 10곳의 어촌계 대표 등이 전남 고흥군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 재판을 광주지법 순천지원 고흥군법원에서 열었다. 지은 지 40년 넘은 2층짜리 고흥군법원에는 피해 어민 150여명이 몰려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재판부는 전날 미리 고흥에 내려와 재판을 준비했다. 재판 시작 1시간 전부터 기다렸다는 어민 신동옥(68)씨는 “판사님들이 이 먼 곳까지 직접 찾아주셔서 고맙다”고 말했다.

홍기태 부장판사는 “많은 분이 찾아주셨는데 장소가 좁아 많은 분이 밖에서 기다리게 해 송구스럽다”는 말로 재판을 시작했다. 재판에는 인근 바다의 피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해녀가 직접 증인으로 출석했다. 여덟 살 때부터 물질을 해왔다는 해녀 양선희(66)씨는 “바다에 하얗게 곰팡이가 펴 버렸다”며 “2005년 이후로는 몰(모자반)이 점점 사라지더니 이제 해초라고는 아예 없다”고 증언했다. 재판부는 법정에 앉은 어촌계 대표들에게 직접 피해 상황을 듣기도 했다. 가야어촌계 김석대 계장은 “판사님들이 현장을 가봐서 알겠지만 고흥만 방조제 안쪽 간척지에서 쓰는 맹독성 제초제가 그대로 담수호로 유입됐다”며 “우리 어민들은 물 냄새만 맡아봐도 안다. 이 비린내는 물이 썩어서 나는 냄새”라고 말했다. 이어 방조제와 가장 가까운 용동어촌계 정충식 계장은 “유명했던 득량만 멸치는 더 이상 잡히지 않고, 어패류는 꿈에도 볼 수가 없다”고 호소했다.

재판부는 오전에 피해 어장 주변을 직접 둘러봤다. 비가 조금씩 내리는 가운데 고흥군 관계자와 피해 어민 등 20여명이 재판부와 함께 배에 올랐다. 재판부는 의문점이 생길 때마다 어민들에게 직접 질문했다. 방조제 안쪽 간척지를 둘러볼 때 한 어민은 판사를 붙잡고 “예전에는 하늘을 까맣게 덮을 정도로 많은 철새들이 찾던 곳이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흥군은 1995년 길이 2.87㎞의 고흥만 방조제를 건설한 뒤 수위 조절을 위해 배수갑문을 통해 수시로 담수를 배출했다. 이에 어민들은 “담수 배출로 인한 환경오염 누적으로 주변 어장의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했다”며 100억원대 소송을 제기했다. 1심 재판부는 “국가가 어민들에게 손해액의 70%인 72억여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다음 재판은 1월 24일 서울고법에서 열린다.

고흥=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