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365-11월 27일] 용서하세요
입력 2012-11-26 17:44
찬송 : 십자가를 질 수 있나 461장(통519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마태복음 18장 21절~35절
말씀 : 참을 인(忍)자 셋이면 살인을 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화를 참는 것이 큰 참사를 막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타인에 대한 자기 인내가 점점 사라져 가는 세상 같습니다. 과거 대가족사회에서는 가정에서 참을성과 양보를 배웠지만, 오늘날은 가정의 이런 순기능들이 많이 축소되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성경은 상대방에 대해 참는 인내의 자세에서 한 차원 더 들어가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입니다. 세상이 가진 도덕적 기준보다 고상한 하나님 나라의 성품을 소유하라고 가르칩니다. 일반 사회에서도 용서가 존재하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용서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요.
첫째, 일곱 번의 용서도 대단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죄를 범한 형제의 용서에 대해서 물으면서 최고 일곱 번까지 용서하는 것을 제시합니다. 당시 일곱 번이라고 하면 사람으로 최선을 다해서 지키는 완전한 행위의 수를 말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용서해 줄 때 용서의 범위를 정해주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예를 들면 아이에게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줄 거야” 또는 “당신 이게 몇 번째인 줄 알아”라고 용서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일곱 번 용서하는 것을 말할 때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용서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아직 용서하지 못한 사람을 몇 번이나 용서해 주었습니까. 사람의 용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용서는 일곱 번을 일흔번까지라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끊임없는 계속적인 용서를 말합니다. 주님은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얼마나 큰 것을 용서받았는지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어떤 값을 주고도 해결할 수 없는 죄의 용서를 받은 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용서를 베풀지 않음으로 자신을 용서해 준 주인의 노를 샀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를 잊으면 안 됩니다. 내가 받은 용서가 어떤 것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 애굽의 종 되었던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잊음으로 그들은 또다시 바벨론의 종이 되는 비참한 역사를 반복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대신하여 값을 치르게 하신 용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용서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우리의 숙제인 용서가 남아 있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무섭고 두려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서받은 자의 마땅한 삶을 요구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큰 용서를 체험한 사람이라면 다른 형제가 저지른 죄들을 용서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사람으로는 할 수 없고 하나님으로 할 수 있는 용서까지 우리에게 하라고 명하십니다. 내가 용서해야 하는 수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준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고 양자 삼은 손양원 목사님 같은 분은 이 용서를 실천하며 사셨던 분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은혜 안에서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도 용서받았다면 용서치 못할 이가 없습니다.
기도 : 주님, 내게는 용서하는 것에 한계가 있습니다. 성령충만함을 주시고 은혜 가운데 용서할 수 있는 용기와 사랑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김창근 목사(서울 광현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