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차피득 (15) “통일되면 北 고향교회 꼭 재건” 아버지 유언 좇아…
입력 2012-11-26 17:59
인쇄용 제판 필름 공급업은 1965년 앤스코양행을 시작으로 73년 대호무역을 거친 뒤 83년 설립된 한국필름에서 꽃을 피웠다. 당시 매출은 100억원대로 일본 코니카사의 필름을 수입해 판매했다. 해방 후 빈손으로 월남한 내가 어떤 배경도, 연줄도 없이 무에서 시작해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은 항상 지켜주시고 돌봐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나는 2000년 둘째아들 의송에게 회사를 넘겨주고 명예회장에 취임했다. 시장도 많이 변화됐다. 인쇄용 필름은 코닥과 아그파 코니카 후지 등 4개 업체가 공급했지만 이제는 인터넷의 발달과 전자책 활성화, 스마트폰 보급 등 산업지형의 변화로 코닥과 코니카가 사업을 포기한 상태다. 현재 한국필름은 사업 다각화를 위해 2011년 비엠솔루션의 지분을 사들여 휴대전화에 쓰이는 필름제작도 하고 있다. 한양대 공대를 졸업한 첫째 송과 단국대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둘째 의송은 새로운 사업에 서로 조언하며 사업을 건실하게 펼치고 있다. 지금 뒤돌아보니 내 인생에 두 가지 의미 깊은 일을 꼽으라면 첫째는 중국 교회 설립과 탈북자 지원, 둘째 ‘미꾸라지 진짜 용된 나라 대한민국’ 책자 발간이다.
1972년 소천한 아버지 차희선 장로는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96년 건국공로훈장(애국장)이 수여됐다. 당신은 늘 “통일이 되면 가물남교회를 반드시 재건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특별한 유언을 남기지 않으셨지만 아버지의 말씀은 내가 반드시 책임져야 할 유언처럼 느껴졌다. 85년 우연히 중국의 먼 친척과 서신 왕래가 시작됐고 중국 랴오닝성 퉁화현에 차씨 일가가 모여 산다는 소식을 접했다. 가까운 친척 할아버지가 아버지의 고향인 가물남에서 살다가 그쪽으로 이민을 갔다는 것이다.
90년대 중반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마을에 도착해 보니 가물남의 모습 그대로였다. 앞에는 넓고 비옥한 논과 밭이 지평선을 이루고 가을철이면 오곡백과가 황금물결 치던 가물남, 1940년대 내가 살던 시골 마을 모습이었다. 마을에 교회가 있다고 해서 찾아갔더니 동평교회라는, 마구간 비슷한 공간에 가마니를 깔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40대 여자 전도사가 찬송을 인도하고 설교도 하고 있었다.
‘그래, 이 교회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동평교회를 도와야겠다. 그게 아버지의 유업을 잇는 길이다.’ 그렇게 99년 신흥교회에서 1000만원, 내가 2000만원을 헌금해 150평짜리 2층 교회 건물을 짓게 됐다. 나와 신흥교회는 동평교회의 성실한 청년 한연준군을 서울로 데리고 와 신학교도 보내주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교회는 한군이 유학생으로 입국하는 문제나 생활비, 신학교 교육에 있어 7년간 성심성의껏 도와주었다.
탈북자 지원도 했는데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김철남이라는 29살짜리 탈북자가 있었는데 부모가 모두 굶어죽고 동생마저 사고로 잃은 사람이었다. 걸어서 탈북하다 보니 육신은 지쳐 병들었다. 2002년 동평교회에서 그를 돌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그를 돕기 위해 모금을 했고 동평교회에 치료에 쓰라며 후원을 했다. 2년간 성경을 읽으며 교회청소를 마다하지 않던 그는 어느 날 교회 돈과 중요 물품을 챙겨 달아나버렸다.
이 사건을 접하며 분노감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기근으로 가족을 잃고 목숨을 걸고 탈북한 이들에게 윤리나 도덕 따위의 이야기는 한가한 소리에 불과하다. 그들의 마음속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을 것이다. 탈북자들을 위한 구제운동을 더 활발히 전개해야겠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