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이 빚어내는 서사시… 이탈리아 사진작가 마리오 자코멜리 회고전
입력 2012-11-25 18:08
시처럼 읽히는 사진, 사진을 떠올리게 하는 시. 이탈리아 사진작가 마리오 자코멜리(1925∼2000)의 작품은 한 편의 서사시 같다. 작가는 빛과 어둠이 만들어내는 조형성에 관심이 많았다. 그 때문에 평생 찍은 작품의 95%가량이 흑백사진이었다. 그의 작품은 ‘진지한 성찰’ ‘조형적인 연구의식’ 등으로 평가되며 현대사진사(史)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서울 방이동 한미사진미술관은 개관 10주년을 맞아 내년 2월 24일까지 자코멜리의 국내 첫 대규모 회고전을 연다. 전시 타이틀은 ‘The Black is Waiting for The White(어둠은 빛을 기다린다)’로 그의 대표작 220여점과 생전의 출판물, 이탈리아 밀라노 포르마 사진전문미술관의 자코멜리 소장품 등을 처음으로 공개한다.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마을 세니갈리아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여읜 자코멜리는 요양병원에서 세탁 일을 하는 어머니를 도와 열세 살에 인쇄소 식자공으로 취직했다. 이때 활자가 흑백으로 인쇄되면서 만들어내는 조형성에 관심을 가져 사진 찍기와 시 쓰기를 즐겼다. 훗날 그는 가난에 대해 “생의 고통과 무게를 가르쳐 준 축복”이라고 표현했다.
생계를 위해 평생 인쇄소를 운영하면서 좋아하는 사진작업을 한 그는 시인이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 ‘나에게는 얼굴을 쓰다듬을 손이 없다’ 연작은 어느 시인의 시에서 제목을 따왔다. 1960년대 초 함박눈이 내리는 날, 가톨릭 신학교 건물 2층에 숨어 있다가 눈 구경을 하러 나온 사제들을 향해 눈 뭉치를 던지면서 시작된 눈싸움 장면 등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는 흑백의 대비를 선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인화 과정에서 불필요한 풍경이나 장면들을 일부 지워냈다고 한다. 1960년대에 마을 주민들 모두 검은색 의상만 입고 사는 이탈리아 전통마을 ‘스카노’를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의 흑백 대비가 한층 두드러진다. 건물이 온통 하얀 대리석인 이 마을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강렬하다.
어머니가 근무하던 요양병원에서 찍은 사진을 가장 좋아했다는 작가는 1983년까지 병원을 드나들면서 작업을 계속했다. 이때 촬영한 ‘죽음이 찾아와 너의 눈을 앗아가리라’는 작품 제목도 어느 시인의 시에서 따왔다. “이제 나는 당신의 몸이 부서지기 쉬움을 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기억하리라/ 당신이 보여 준 모범을.”(자코멜리의 시 ‘나의 어머니’ 중에서)
“사람 얼굴에 주름이 있듯이 풍경에도 세월의 주름이 있다”며 어둠과 밝음의 이미지 구현에 몰두한 그의 작품은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연작을 소장했을 만큼 주목 받기도 했다. 전시를 기획한 송수정 큐레이터는 “자코멜리는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기에 더 자유롭고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펼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관람료 5000∼6000원(02-418-1315).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