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웅 목사의 시편] 나의 무덤을 응시하면서

입력 2012-11-25 17:44


이스라엘에서 ‘마약 중독자 치유센터’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만난 미샤라는 형제를 잊을 수 없다. 그는 청소년 시절 범죄 조직에 들어가면서 마약에 손을 댔다. 나중에는 그의 부모조차 도무지 아들을 감당할 수 없어서 쫓아버렸다. 길거리에서 그는 닥치는 대로 훔치고 강탈하며 감옥을 들락거리면서 살았다. 그 즈음 그의 부모는 아들이 마약에 중독되어 벌써 죽었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결국 아들이 죽은 줄 알고 시신도 없이 빈 관을 만들어 공동묘지에 장사지냈고 그 뒤로 부모는 날마다 울면서 살았다고 한다.

미샤와 함께 마약에 중독된 친구들이 다 죽어가는 것을 그는 목격했고, 자신도 몇 달 살지 못할 거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으면서 그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혔다. 바로 이 즈음에 함께 마약을 하던 친구가 복음을 믿고 미샤를 전도하면서 미샤는 극적으로 변화를 받았다. 그는 마약치유센터에서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변화 받은 뒤 그는 부모를 찾아갔고 부모는 살아 돌아온 아들을 보면서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아들의 손을 잡고 제일 먼저 데려간 곳이 바로 미샤의 무덤이었다고 한다.

미샤가 공동묘지에 갔을 때 그는 기가 막혔다. 자신의 무덤을 자기의 눈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미샤는 그곳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너는 이미 이 묘지에 죽어 묻혔다. 너는 이제부터 새로운 하나님의 피조물이야!” 이 말이 미샤의 폐부에 박혔다고 한다.

미샤의 폐부에 박힌 말이 나의 마음에도 박혀 버렸다. 내가 미샤를 만났을 때 그의 눈빛은 맑았다. 마약 중독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자유와 평안의 향취가 은은하게 풍겨나오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내공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힘을 어떻게 표현할까? ‘옛 자아의 무덤을 응시하는 자의 자유함’이라고 할까? 아니면 ‘옛 사람의 죽음을 확인하는 자의 담대함’이라고 할까? 미샤의 능력은 거기에 있었다.

능력의 비밀이 죽음에 있다는 진리는 결코 진부한 진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삶에 힘겨워할 때마다 항상 새롭게 발견하고 돌아가는 진리는 바로 이 진부한 진리가 아닌가? 내가 예수와 함께 이미 죽었기 때문에 오늘도 담대히 자아의 죽음을 다짐할 수 있다.

평생 바깥출입을 금한다고 하는 봉쇄수녀원에서는 종신서원식을 마친 수녀들을 제일 먼저 뒤뜰로 데리고 간다고 한다. 그리고 하는 말, “구덩이를 파세요. 이곳이 수녀님이 묻힐 곳입니다. 이제 이 구덩이는 덮이지 않습니다. 수녀님이 훗날 이곳에 누울 때까지 말입니다.” 이미 예수와 함께 죽은 몸이니 끝까지 죽은 자로 여기면서 자기를 죽이며 살라는 것이 아닌가? 죽음 안에 생명이 있다는 진리를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그리운 시절이다.

<서울 내수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