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의 온상’ 정치테마주] 참기 힘든 유혹·개미들의 무덤
입력 2012-11-23 23:21
대선이 임박할수록 정치 테마주에 낀 거품은 급속히 꺼진다. 거액을 걸면서도 기업 실적이나 전망이 어떻든 파산 직전만 아니면 상관하지 않는 게 정치 테마주 투자 방식이다. 선거 기간 테마주 가격 변화는 판세를 반영하지만 결국은 투자자 대부분이 막대한 손실을 입고 끝난다.
지난해 9월 1일부터 이달 16일까지의 EG·우리들생명과학·안랩 주가 추이는 이런 결과를 암시한다. 이들 종목의 가격 변동 추이는 움푹 팬 분화구를 세로로 자른 단면과 같다. 이들 주가는 일단 해당 기간의 평균보다 낮은 수준에서 가파르게 올라가 정점을 찍은 뒤 소폭의 등락을 거듭하며 일정 가격을 유지했다. 이후 다시 상승해 또 하나의 봉우리를 만들고는 미끄러지듯 큰 폭으로 하락했다.
최고가와 현재가의 차이가 보여주는 주가 폭락의 실상은 신랄하다. 최고가와 이달 16일 현재 가격 차이는 종목별로 EG 52.8%(4만2600원), 우리들생명과학 25.9%(1035원), 안랩 71.4%(11만4100원)에 이른다. 각각 최고가에서 300만원어치를 샀다고 가정하면 최근까지 각각 158만4000원, 77만7000원, 214만2000원을 날렸다는 의미다. 지금 가격도 대선 국면 이전보다는 상당히 높은 수준이어서 추가 하락 여지도 있다.
거품이 낀 테마주 가격의 상당 부분은 대선 이후 안개처럼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최근 금융당국에 따르면 이미 주식시장에서는 대선 테마주 134개 종목의 최대치 대비 시가총액이 9조9875억원이나 증발하며 정확히 반쪽이 됐다. 16일 기준 안랩의 시가총액은 4586억원으로 최대 규모였던 1조6012억원의 28.7%에 불과하다. 대선 정국에서 안랩 주가의 견인차였던 안철수 후보가 23일 백의종군을 선언하자 투자자들은 더욱 불안해하고 있다.
정치적 이슈에 따라 오르내리는 정치 테마주 몸값은 일종의 모래성이다. 급변하는 정세에 기대어 끌어올린 주가는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작전세력까지 끼어드는 경우가 많아 일반 투자자들의 무덤이 되곤 한다.
2007년 17대 대선 때는 소형건설사 이화공영의 주가가 최고 36배까지 뛰었다. 이화공영은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대운하 공약을 등에 업은 대표적 MB 테마주였다. 선거 직전인 2007년 12월 초 정점(6만7300원)을 찍은 이화공영의 지금 주가는 어떨까. 지난 21일 기준으로 1820원이다. 최전성기 때의 2.7%밖에 안 되는 수준으로 폭락했다.
한국에서 정치 테마주는 15대 대선을 앞둔 1997년 처음 등장했다는 것이 증시의 통설이다. 당시 김대중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커지자 대북지원 수혜주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노무현·이회창 후보가 맞붙은 2002년 16대 대선 때는 충청권으로의 수도 이전 계획과 관련한 테마주가 쏟아져 나왔다. 특히 계룡건설, 대아건설, 한라공조 등 충청지역에 연고가 있는 기업이 먼저 주목을 받았다.
또 노무현 후보가 당선된 뒤에는 DJ 정부의 ‘햇볕정책’ 기조가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에 따라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관련 기업 등 남북 경협 수혜주가 관심을 끌기도 했다. 17대 대선까지 정치 테마주는 후보의 정책과 관련한 업종 위주였다.
하지만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기점으로 정치 테마주 성격이 변질됐다. 정책보다 후보 인맥에 따른 종목이 출렁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경원 테마주로 불렸던 ‘한창’과 박원순 테마주 ‘휘닉스컴’은 각각 대표이사가 후보와 대학동기이거나 고교 동아리 동기라는 이유로 주가가 3~5배 치솟았다. 이들 업체 주가는 선거 후 원래 수준으로 폭락했다.
18대 대선을 앞두고 부상한 정치 테마주는 대부분 대선 후보와 기업이 인맥으로 연결돼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시장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상한가’ ‘사돈의 팔촌주(株)’ 같은 우스갯소리가 떠돈다. 정부가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업체의 뒤를 봐준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셈이다. 인맥 중심의 정치 테마주가 기승을 부리는 것은 그만큼 후보들의 정책에 차별성이나 특징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웬만한 투자 방식으로는 수익을 낼 수 없는 장기 불황이 기형적 정치 테마주를 부추긴다는 분석도 있다. 경기가 흉흉한 틈을 타 ‘한탕주의’가 판치는 것이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