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라동철] 서울광장의 명암

입력 2012-11-23 18:55


오래전 일이다. 1998년 4월 취임 2개월을 맞은 김대중 대통령이 서울시청을 찾았다. 강덕기 시장직무대리로부터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김 대통령은 공사가 한창이던 여의도공원 조성사업에 대해 불만을 불쑥 쏟아냈다.

“공원을 만든다고 여의도광장(5·16광장)을 없애 결국 서울시는 광장 없는 도시가 됐어요. 이런 도시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습니다.”

날선 질책에 업무보고장은 한순간 서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당시 서울시를 출입하던 기자는 청사 내 방송을 통해 김 대통령의 발언을 듣고는 고개를 갸웃거렸었다. ‘아스팔트 덩어리인 삭막한 광장보다는 나무와 꽃이 있고, 흙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공원이 더 좋은 거 아닌가?’라고 반문하면서. 97년 대선 과정에서 반대편에 섰던 조순 전 서울시장이 재임 중 추진한 역점사업이라 괜히 심통을 부리는 거 아니냐는 수군거림이 기자실에서 오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여의도광장의 공원화가 좋은 선택이었다는 기자의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15t 덤프트럭 1500여대 분량의 아스팔트를 모두 걷어내고 조성해 99년 1월 개장된 여의도공원은 여의도의 보물이다. 도심 속 훌륭한 산책 및 휴식 공간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그러나 공원이 좋다고 해서 당시 김 대통령이 제기했던 ‘광장 필요론’까지 무시하는 건 아니다. 그가 염두에 둔 광장이 국군의 날 행사 같은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나 수많은 관중이 운집하는 유세 및 집회 용도의 광장이 아니라면 말이다.

광장은 사람들이 모여 놀고, 이야기를 나누고, 햇살을 즐기며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공간이다. 그처럼 소통이 이뤄지고 여유가 살아 있는 광장이라면 다다익선이다. 여의도광장이 사라진 후 광장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이던 2004년 5월 시청 앞에 서울광장이 들어서면서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길거리 응원을 계기로 여론이 형성돼 조성된 서울광장은 총면적 1만3297㎡의 타원형 잔디광장이다. 주위에 시청과 덕수궁이 있고, 서울 한복판이라는 상징성 때문인지 이곳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임시 스케이트장 설치작업이 한창인 가운데 23일에는 한민족축제, ‘국민의 생각, 국민의 서재 캠페인’, 구세군 자선냄비모형물 설치·전시 등의 행사가 잇따라 열렸다. 주말인 24일에는 쌍용차문제 해결을 위한 범국민대회와 투표시간 연장을 위한 집회 등이 예고돼 있다. 25일에는 국산 돼지고기 소비 촉진 행사가 열리고, 다음 주에도 전국농민대회(27일), ‘세계 사형반대의 날’ 행사(30일) 등이 이어진다.

광장 사용이 2010년 9월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뀐 뒤 이용 단체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서울광장에서는 지난해 253건의 행사가 열렸고, 올해도 270건이 넘는 사용 신청이 수리됐다. 광장이 비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다. 행사가 2∼3건씩 겹치는 날도 많다.

서울광장이 인기를 끌고 있지만 뒷맛이 개운치만은 않다.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본연의 광장인지에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각종 단체들이 이용료를 내고 행사나 이벤트를 여는 공간으로 전락한 거 아니냐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마땅한 공간이 부족해서겠지만 광장이 행사 위주의 공간으로 변질돼 가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대형 스피커를 동원한 이벤트나 공연, 집회가 잦다보니 주변 직장인들 중에는 소음피해를 호소하는 이들도 있다.

서울광장이 일반 시민과 관광객들이 아무 때나 부담 없이 찾아가 어울리고 소통하는 생활공간으로 다시 태어나길 바라는 건 나만의 욕심일까.

라동철 사회2부 선임기자 rd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