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여러가지 결혼

입력 2012-11-23 18:11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58∼1603)는 45년이라는 오랜 기간을 ‘처녀 국왕’으로 통치했다. 그런데 몇 남자가 그녀의 품을 거쳐 갔다고 하니 연인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나랏일 앞에서 사사로운 연정을 짓이겨 버릴 수 있는 차디찬 철의 여인이었다. 연인들이 권력에 너무 근접한다고 일단 판단이 서면 유배당하거나 머리가 잘려 죽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1000년 영국사에서 가장 훌륭한 통치자로 기억되는 그가 사랑은 하되 왜 결혼을 거부했는가에 대해서는 견해가 분분하다. 엘리자베스의 가계를 보면 결혼을 거부한 상황이 이해가 된다. 아버지 헨리 8세는 여섯 번의 결혼을 했는데 이 같은 결혼 횟수는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엘리자베스를 낳은 사람은 두 번째 부인 앤 볼린(Anne Boleyn)이었다. 그런데 아들이 아닌 딸을 낳았다고 하여 헨리 8세는 앤 볼린을 멀리했고 3년 후에는 간통 혐의로 참수하고야 만다.

본성을 따른 이성과의 결혼

이복언니 메리 튜더(Mary Tudor)가 왕위에 오르자 엘리자베스는 런던탑에 갇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나날을 보낸다. ‘피에 젖은 메리(Bloody Mary)’라고 불릴 정도로 잔인한 메리 튜더였지만 차마 여동생을 죽이지는 못한다. 몇 년 후 메리 튜더가 세상을 떠나고 왕위는 엘리자베스의 것이 됐다. 엘리자베스는 왕실 결혼이 빚어낸 비극적 삶의 현장에서 거의 주연이나 다름없었기에 왕이 된 후에도 결혼을 거부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리라. 영국을 조그마한 섬나라에서 대제국으로 만들었던 엘리자베스, 이 처녀 국왕은 한 남자와의 본성적 결혼 대신 ‘나는 국가와 결혼했노라’고 외치면서 일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나는 국가와의 결혼이나 어떤 이상과의 결혼을 말할 정도의 위인은 되지 못한다. 그러기에 자연 본성에 따라 한 여자와 결혼해 사는 편을 원했다. 결혼 전후를 비교해 보면 눈에 띄게 다른 것이 하나 있다. 아내의 잔소리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외지로 나가 거의 독립적으로 생활했지만 결혼하면서 삶의 양상이 달라졌다. 매사를 상의하거나 토론하고 때론 격론에 설전까지 벌여야 한다. 그런데 왜 그런지 몰라도 승전보다 패전이 압도적이다. 하지만 다행으로 생각하는 것은 나의 물러섬이 대개는 내게 이롭거나 적어도 해가 되지 않는 방향으로 흐른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나는 목이 짧은 양말을 손수 사서 신고 다니다 양말에 대해 아내와 한바탕 토론을 벌여야 했다. 물론 우리의 양말전(戰)은 모름지기 목이 적당한 양말을 신어야 한다는 쪽으로 당연한 결론에 이르렀다. 아내의 설명이 옳다. 양복 정장을 입은 신사라면 목이 짧은 양말을 신어서는 체면이 안 서는 것이다. 내 나이 오십 줄을 바라보는데도 양말 하나 제대로 구색을 못 갖추니 아내가 속이 타는 면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나로서도 할 변명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본래 양말의 목이 짧거나 긴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잘못이 있다면 어느 날 우연히 내 눈에 목이 짧은 양말이 들어온 것과 내 손이 그걸 골라 집었던 것뿐이다.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이야기로 사랑과 결혼의 서약이 이어지겠지만 결혼생활에는 성실과 신의가 뒤따라야 한다. 딸아이가 4학년 때인가,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아이만을 데리고 유럽의 박물관을 돌았어야 했다. 집을 떠난 지 3주 만에 동양인이라고는 한 명 없는 중세풍 시골 도시 이탈리아 라벤나에 도착했다. 고색창연한 중세 도시 라벤나는 낯선 고립감으로 우리를 맞았다. 그 도시에 내리자마자 딸아이는 대뜸 “아빠! 엄마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잘 안 나”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 역시 아내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얘야, 아빠도 엄마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구나.” 아빠와 딸은 호텔로 가서 허둥지둥 노트북을 켜고 바탕화면에 엄마 사진을 깔아 놓았다. “얘야, 잘 봐라. 엄마는 이렇게 생겼단다.” “아! 엄마가 이렇게 생겼었지.” 우리는 한바탕 웃으며 넘어갔다. 이때 내가 깨달은 것 하나는 신의 있는 남편이 되려면 떨어진 지 3주가 되기 전 컴퓨터 바탕화면에 아내의 사진 정도는 깔아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결혼

그러나 나는 알고 느끼고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처럼 국가와 결혼하든, 오늘날 우리처럼 자연 본성에 따라 결혼하든 이런 식의 결혼으로는 우리의 삶이 온전해질 수 없다(참조 마 19:21). 이는 결혼을 중세 천주교의 성례전에서 격하시켜 시민법의 영역으로 옮겼던 종교개혁자 루터도 분명히 했던 관점이다. 사막의 구도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결혼에 최고 가치를 부여했다. 영적인 결혼이란 그리스도의 말씀을 무한 신뢰하는 태도다. 자연 본성에 따르되 그 본성에 매몰되지 말아야 하고, 생의 동반자에게 사랑과 신의와 성실을 다하지만 그것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는 자라야 그리스도와 한 영이 된다(고전 6:17). 그리스도와 영으로 하나 될 때라야 이성 간의 사랑까지도 더욱 진실한 사랑이 되고 결혼의 서약도 더 짙은 약속이 되리라(엡 5:28).

<한영신학대 역사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