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긍정의 배신
입력 2012-11-23 17:40
로마서 4장 18~25절
한국 개신교회가 양적 성장은 급속도로 이루었지만 성장의 이면을 보면 ‘비성서적인 원리’가 지배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긍정의 신학’이 그것이다. ‘잘 된다, 잘 된다’ 하면 정말로 잘 된다는 식의 일종의 마인드컨트롤이다. 한국교회는 바로 이런 긍정의 신학을 따라 성장했다.
조엘 오스틴 목사가 쓴 베스트셀러 ‘긍정의 힘’. 언뜻 들으면 그럴싸하다. 아주 신앙적인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긍정의 힘에는 무서운 함정이 있다. ‘하나님을 이용한 성공의 기법’이 그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도 원하고 있다’, 이렇게 긍정하면 자석이 철가루 사이를 지나가듯 성공이 따라온다는 것이다. 그럴싸하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고속도로를 과속하며 질주하다 단속 카메라를 지나쳤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때부터 기도하기 시작한다. “하나님 제가 얼마나 중요한 일로 가고 있는 줄 알고 계시죠? 딱지가 날아오지 않게 해주세요. 아멘!”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바른 신앙일까. 지금 이 시대 한국교회는 이와 다를 바 없는 것들을 배워왔고, 그렇게 기도해왔으며, 지금도 이렇게 가르친다.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 보면 긍정의 힘은 결국 배신하게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마니교라고 불리는 집단이 있었다. 그들은 초대교회를 위협하는 큰 세력으로 200여년간 큰 세력으로 확장됐지만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긍정의 신학을 이용해 순수한 신자들을 기만하는 일부 교회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양손에 먹을 것을 잔뜩 들고 있으면서 남의 손에 있는 것을 탐하는 욕심 많은 돼지가 생각나는 것은 비단 나만의 일일까.
우리의 신앙생활도 혹시 이렇지 않은가. 내 성공을 위해, 내가 원하는 일을 위해, 내 명령대로 하나님이 움직이길 바라면서 기도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그 하나님은 내 개인 비서이지 더 이상 ‘공의롭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다. 성경은 내 명령대로 움직이는 하나님을 전하지 않으며, 그런 조잡한 기복신앙이 바른 신앙이라고 선언하지도 않는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내 손 안에 잡혀 있는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끌어내리고, 인간의 소욕과 탐심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것, 그것이 교만이고 죄다. 이 죄를 돌이키지 않으면 우리는 희망이 없다. 성경은 긍정의 신학이 속삭이는 그런 힘없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선포하지 않는다. 로마서 4장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을 믿음이라고 선언한다. ‘내가 바랄 수 없는 것’이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것, 내 이성의 범주를 넘어선 것,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의미한다. 내가 바랄 수 없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지금까지 있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생기리라고 기대하지 못할 것을 말한다. 내가 바랄 수 없는 것이란 시체처럼 죽어버린 내 영혼과 육체, 그리고 한국의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이 ‘우리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랄 신앙’의 내용이다. 바로 이것을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이셨고, 그분을 따라 사도들과 신앙의 선배들이 보여준 것 아닌가. 예수쟁이가 된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긍정의 힘) 하나님을 조종하는 힘’을 갖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최주훈 목사(중앙루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