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차정식] 빛은 아름다운 것
입력 2012-11-22 19:37
대선 게임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여권 후보가 새 시대를 표방하는 각종 구호와 공약을 쏟아낸다. 이에 뒤질세라 야권의 단일화 수순에 맞춰 굴러가는 정치 일정도 긴장을 더해간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철마다 이러한 변화의 몸짓들이 용솟음치고 쟁쟁하게 부대끼며 다투는 것은 괜찮은 희망의 조짐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합이 빛의 어우러짐 가운데 평화롭게 축제처럼 치러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역사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말로는 선의의 경쟁이지만 거의 전쟁을 방불케 하는 생존 싸움은 굳이 정치판을 들먹이지 않아도 일상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폭력적 일상이 먼 바깥 세계로 통하면 로켓 포탄과 폭격기의 공습으로 애꿎은 생명이 숱하게 죽어나가는 팔레스타인의 비극이 겹쳐 떠오른다. 수십 년간 평화 협정을 맺고도 툭하면 싸우는 그곳에서 또다시 여린 생명들은 죽음의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 이스라엘이 우월한 무력을 동원하여 진압한 결과는 늘 약한 편의 즐비한 시체들이었다. 항상 수십 배, 수백 배의 보복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런 전쟁 게임의 소문은 세모로 향하는 이 계절을 우울하게 만든다.
이 시대의 슬픈 초상들
한반도는 어떤가. 남북 간에 꽁꽁 얼어붙은 소통의 문은 지난 5년간 열리지 않은 채 적대감만 키워 왔다. 어두운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관계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한 채 한 오라기 환한 희망의 빛이 아쉬운 이즈음이다.
어디 그뿐인가. 만성 불경기에 찌든 직장인들의 좌절, 영세상공인들의 한숨과 해직자들의 탄식, 일자리를 얻지 못해 어깨 처진 젊은이들, 학원에서 밤늦게까지 죽치고 앉아 서열화된 경쟁의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위해 졸고 있는 자녀들…. 모두가 따스한 빛이 그리운 이 시대의 슬픈 초상들이다.
이틀 전 전기세 16만원을 못 내서 전기가 끊긴 전남 고흥의 한 가난한 집에서는 촛불을 켜놓고 잠들었다가 화마에 휩싸여 할머니와 손자가 숨지는 가슴 아픈 사고가 있었다. 이런 안타까운 일들은 수시로 일어나 사랑이 부재한 우리 시대의 부끄러움을 일깨운다. 시대의 큰 희망이 이 땅의 그늘에 작은 현실로 성육화되지 못하면 아무리 시대를 호령하는 목소리가 우렁차도 생명을 살리는 빛의 감화에 미치지 못한다.
구약성서 전도서는 컴컴한 날들이 많은 인생의 곡절을 무릅쓰고 지혜를 살려 이렇게 말한다.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 요한복음은 예수를 빛의 원형처럼 묘사하며 그 빛이 어둠 속에 성육하였음을 선포한다. 메시아는 이미 이 땅에 왔다.
이 땅의 지도자들은 온갖 요란한 구호로 근심에 찌든 생명들을 들쑤시지 말았으면 좋겠다. 또 다른 메시아를 갈망하도록 선동할 에너지가 있다면 먼저 이 땅에 가득한 생명의 빛을 발견하길 바란다. 조금 더 용기를 내서 겸손히 빛의 선교에 동참할 수 있다면 우리는 낮은 골짜기를 북돋고 높은 산을 깎아내려 평탄케 하는 메시아의 사역에 힘쓸 일이다. 그 빛이 따스한 온기를 발하여 낮은 그늘에서 신음하는 여린 생명들이 일용할 양식이라도 넉넉히 챙길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도와줄 일이다.
빛의 신기원을 고대하며
빛의 아름다움은 겨울에 더 살갑게 다가온다. 눈이 부셔도 해를 바라보며 살아 있음을 실감하는 계절도 지금이다. 신문 방송에 큰 목소리로 튀는 선거열풍의 한 변두리에서 나는 원점으로 회귀하는 빛의 신기원을 꿈꾸어 본다. 모두에게 공평한 그 빛의 선물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으로 일상 가운데 누려지고 조직과 체계에 얽매여 눈치 보며 사는 가난한 생명들에게 해방의 사건으로 체험되는 바로 그런 날 말이다. 한 장 남은 달력이 외롭게 떨고 있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빛의 세례는 진정 누구에게나 아름답게 다가올 것인가.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신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