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러서서 이기는 나이, 지천명의 고백… 맹문재 네 번째 시집 ‘사과를 내밀다’
입력 2012-11-22 18:28
맹문재(49·사진)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사과를 내밀다’(실천문학사)는 시가 일상에서 불태워져 주변을 어떻게 따스하게 덥히는지, 덥히면서 주변을 높이는 한편 자신은 어떻게 조용히 물러서는지를 보여주는 고백의 방식이 돋보인다. 그것은 세상과 싸워 이기지 않고, 다만 지는 것이 시인의 역할임을 증명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당숙이 나를 한 여자 앞에 앉혔다/ 소위 큰손이라는 이였다/ 집을 수십 채 가지고 있기에/ 이번 일을 잘하면 기회를 잡는다고 했다// (중략)// 부동산 전술가인 여자는/ 정계로 진출할 꿈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문학박사이고 대학교수인 점을 얹어/ 자신의 자서전에/ 집 한 채를 얹겠다고 했다// 당숙은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시인의 손을 잡았다”(‘시인’ 부분)
그의 고백시편엔 들켜버린 양심이란 게 작동한다. 시골에서 상경한 어머니를 집으로 모시고 간 정황에서도, 모기를 잡으려는 살생의 순간 앞에서도, 동네 담벼락 밖으로 나온 사과 한 알을 주인 몰래 따서 손에 쥔 상황에서도, 들켜버린 양심은 얼굴을 불그스레 물들이며 작동한다. 공고 출신으로 안양대에서 국문학을 가르치는 그는 오랜만에 모교를 찾았다가 수위로 일하고 있는 옛 국어 선생님을 만났으되 자신을 못 알아보는 야속함에 이렇게 응대하기도 한다.
“그래? 그럼 교가를 한번 불러봐!// 나는 스무 몇 해만에 왕주먹 같은 공고생이 되어/ 교가를 부르기 시작했다”(‘교가를 부르다’ 부분)
세상은 당혹스럽고 시인은 당황해 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황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실존과 대면시켜 스스로 당당해 지는 것이 맹문재의 미덕이 되고 있다. 그 당당함이란 정녕 세상에 지는 일일진대, 주택가 골목을 지나다 고무딸기 한 개를 따먹었다가 앞을 막아선 검은 개 앞에서 졸지에 도둑으로 몰린 사내의 표정이 바로 그것이리라.
“딸기 하나 따 먹고 도둑놈 취급을 받기에는 억울했지만/ 송아지만 한 개를 이길 수는 없었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오고 있었다// 나는 개에게 붙잡힌 채 고무딸기를 내뱉고 있었다”(‘오십 세’ 부분)
송아지만한 개의 출현이 사실이라고 해도 여기서의 검은 개는 시인이 먹은 나이나 마찬가지다. 지천명(知天命). 그것은 다시 벌거벗는 나이. 세상을 이길 수 없음으로 세상에서 물러나는 나이. 물러나서 이기는 나이. 요즘 ‘나쁜 남자’가 대세라지만 맹문재는 시류에 아랑곳하지 않고 ‘착한 남자’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