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응답하라, 이인성 한국문학의 전위여… 비평가 김윤식의 ‘전위의 기원과 행로’

입력 2012-11-22 18:23


2006년 2월, “글쓰기에 집중하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서울대 불문과 교수직에서 명예 퇴직한 소설가 이인성(59). 그는 근대소설이 지닌 언어적 한계를 밀고 나아가면서 그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까지 포착해내는 관념소설과 해체적 글쓰기를 보여준 전위적 작가이다. 하지만 전업 선언 이후 소출은 적었다. 그해 계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단편 ‘돌부림’을 발표한 게 전부였으니 근 5년 동안 문단 선후배들은 이인성에 대해 궁금해 했다.

그러던 차에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가 이인성에 대해 펜을 댔다. ‘전위의 기원과 행로’(문학과지성사)가 그것. ‘이인성 소설의 앞과 뒤’라는 부제의 이 책은 ‘문학과지성사’를 캠프로 한 평론가 김현(1942∼1990), 소설가 이청준(1939∼2008), 그리고 제자이자 후배인 이인성이 주고받은 상호영향을 분석하면서 이인성에게 어서 새 작품을 내놓으라고 채근하는 일종의 독촉장으로 읽힌다.

전남 목포 출신인 김현이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한 것은 1960년. 4·19가 일어난 해이다. 김현은 1967년 이렇게 고백한 바 있다. “나는 김붕구 교수의 ‘불문학 산고’와 말로의 소설 몇 권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 책들 속에서 나는 나의 연약한 정신이 너무 쉽게 마취되어버린 몇 개의 섬뜩하도록 쇼킹한 어휘들, 가령 절망·부조리·행동·불안·기분·구원 등등에 부딪치게 되었고, 나는 그 어휘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정확한 내포와는 상관없이 나 자신의 의식 속에 그들을 병치시키고 결합시켜, 그 결합된 상태를 즐기게 되었다. 여하튼 20세기의 초기에 얻어진 유럽대륙의 불온한 공기를 나는 내 자신의 내부 속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고 거기에 추호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16∼17쪽)

예컨대 김현은 4·19세대이자 한글세대의 선두주자로 서양문학과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주인공이다. ‘프랑스문학=문학’이라는 도식이 김현에게는 선험적으로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김현의 제자인 이인성은 1980년 광주 세대에 속한다. 서울대 동숭동 캠퍼스에 입학했다가 관악산 캠퍼스에서 졸업한 이인성은 작고 직전의 김현으로부터 유고를 넘겨받는다. 이로 인해 그는 김현 문학의 적자로 불리게 된다. “우리 감각으로는 예기치 못했던 멋대가리 없는 멋진 신세계에라도 내던져진 느낌. 거기엔 동양에서 제일 큰 캠퍼스라는 명분 하에 동양에서 제일 추운 캠퍼스로, 오지로 유배당했다는 피해의식도 깊이 거들고 있었을 것이다.”(77쪽, 이인성 ‘식물성의 저항’)

“관악 캠퍼스에서 안으로도 들어갈 수 없고, 밖으로도 나갈 수 없던 딜레마로 인해 이인성이 붙든 것은 ‘자기’에로 나아가기였다. 김윤식은 이를 ‘소설적 자기 탐구’라고 명명하고 있다. “그것은 유독 이인성만이 아니고 ‘그들’ 시대의 지향성이기도 했던 것. 소설 쓰기가 그것.”(80쪽)

스승 김현을 잃고 관악 캠퍼스에 외롭게 남겨진 이인성에게 다가온 인물이 이청준이다. 이청준은 김현으로 하여금 관악이라는 외로운 산정을 떠나 인간 냄새 풍기는 토종의 속가로 안내한 장본인이다. 이인성은 김현 작고 9년 만인 1999년 이렇게 고백한 바 있다. “작년 봄, 놀랍게도, 나에겐 기적이 이루어졌다. 아주 잠깐 동안이었으나, 그때 나는 이 세상 너머 다른 세상으로 갔었다. 3박4일 동안, 나는 이 세상인데 이 세상이 아닌, 이 세상 위에 떠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는 다른 세상을 날아다녔다.”(255쪽, 이인성 ‘종소리와 판소리 사이’)

이청준은 1998년 4월 24일 이인성을 비롯해 11명의 지인들과 더불어 자신의 고향이자 소설 ‘축제’의 무대인 전남 장흥 기행에 나선다. 이인성은 그때 남도 판소리와 춤꾼들의 춤사위에 탄복했던 것이다. 일찍이 가난을 경험한 토종의 이청준이 체험의 한 축이라면 김현은 프랑스 문학으로 상징하는 선험의 한 축이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김 교수는 선험과 체험 사이에 낀 이인성에게 김현도 이청준도 아닌 이인성에게만 있는 문법의 소설을 출산해주길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