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현대시 산책 감각의 연금술] (40) 나는 사랑하고 당신은 말이 없다… 시인 유희경

입력 2012-11-22 18:27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 가냘픈 목에 티셔츠를 끼워 넣는 그 별거 아닌 찰나, 유희경(32)은 전사(前史)가 함께 통과하는 것을 본다.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당신은 모른다/ 식탁 위에 고지서가 몇 장 놓여 있다/ 어머니는 자신의 뒷모습을 설거지하고/ 벽 한 쪽에는 내가 장식되어 있다// (중략)//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간밤 당신 꿈을 꾼 덕분에/ 가슴 바깥으로 비죽이 간판이 하나 걸린다/ 때 절은 마룻바닥으로 못이 녹슨 머리를 박는 소리/ 당신을 한 벌의 수저와 묻는다”(‘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부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와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를 나온 유희경은 2007년 신작희곡페스티벌에서 희곡으로 등단한 데 이어 이듬해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으니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는 그의 등단작이다. 티셔츠에 목을 넣는 순간, 자신이 살아온 삶이 전광석화처럼 지나가고 일상의 공기 중에 흐르는 사금 같은 기억들이 그 좁은 터널에서 함께 빠져나오고 있다.

몇 년 전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담은 첫 시집 ‘오늘 아침 단어’(2011)엔 그의 전사가 이야기 성 짙은 배열과 함께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집은 현재에서 시작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갑자기 어른이 됐고, 어른이 되고 난 후에야 어머니란 단어를 인식하게 됐다는 유희경은 시집의 첫 장에 “나의 어머님께”라는 한 줄의 헌정사를 적었다. 그리고 시집 마지막엔 그를 잉태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인 ‘면목동’을 배치했다.

잉태의 순간까지 탐색하는 복기의 힘

21세기 모던보이의 치열한 성장스토리

“아내는 몰래 깨어 제 무게를 참고 있었다 이 온도가 남편의 것인지 밤의 것인지 모르겠어 이렇게 깜깜한 밤이 또 있을까 눈을 깜빡이다가 도로 잠들고/ 별이 떠 있었다 유월 바람이 불었다 지난 시간들, 구름이 되어 흘러갔다 가로등이 깜빡이고 누가 노래를 불렀다 그들을 뺀 나머지 것들이 조금 움직여 개가 짖었다/ 그때 그게 전부 나였다 거기에 내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건 남편과 아내뿐이었다 마음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면목동’ 부분)


‘면목동’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랑을 나눈 그날 밤의 이야기이다. 누군가의 무게, 그것이 밤의 정령인지, 남편의 몸인지 정녕 알 수 없었던 그날, 유월의 바람이 불었고 별이 떠 있었고 구름이 흘러갔고 노랫소리가 들렸고 개가 짖었다. 이 모든 것이

‘나’를 지상에 데리고 온 조각들이었다. ‘나’의 영혼이 비로소 하나의 몸으로 빚어지기 시작한 그날을 기점으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은 역순으로 복기되고 있다. 이렇듯 그의 시에는 이야기가 흘러간다. 아니, 그는 흘러간 삶을 첫 시집에 죄다 쏟아내어 소진해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시집엔 사랑도 적혀 있다. 왜 아니겠는가. 누군가를 잃었다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지 않은가.

“둘이서 마주 앉아, 잘못 배달된 도시락처럼 말없이, 서로의 눈썹을 향하여 손가락을, 이마를, 흐트러져 뚜렷해지지 않는 그림자를, 나란히 놓아둔 채 흐르는// 우리는 빗방울만큼 떨어져 있다. 오른뺨에 왼손을 대고 싶어져 마음은 무럭무럭 자라난다 둘이 앉아 있는 사정이 창문에 어려 있다 떠올라 가라앉지 않는, 생전(生前)의 감정 이런 일은 헐거운 장갑 같아서 나는 사랑하고 당신은 말이 없다”(‘내일, 내일’ 부분)

대학 졸업을 앞두고 밥벌이가 필요했던 유희경은 책을 좋아했기에 그저 막연하게 편집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후 문학과지성사 홈페이지에서 공채 정보를 알게 됐고 몇 차례의 관문을 넘어 입사할 수 있었으니 그의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직장 선배이자 여섯 살 연상인 이근혜 편집장과 지난달 말, 백년가약을 맺은 일이야말로 21세기 모던 보이 유희경의 실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청년에서 가장으로의 성장 스토리는 마침표가 없고 사랑도 마침표가 없다.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