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제주 한바퀴 ‘그녀의 길’ 문화가 되다…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과 걷는 마지막 21코스

입력 2012-11-21 18:12


제주올레의 스물여섯 번째 길이자 도보로 제주도를 한 바퀴 잇는 마지막 구간인 제주올레 21코스는 하도리의 제주해녀박물관에서 시작된다. 면수동을 비롯해 7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는 제주도에서 해녀가 가장 많은 마을. 일제 강점기 때 제주해녀항쟁이 벌어졌던 진원지이기도 한 하도리의 해녀는 350여명.

제주올레 21코스는 해녀들의 삶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숨비소리 길’을 한동안 걷는다. ‘숨비소리 길’은 해녀박물관 주변에 조성된 4.4㎞ 길이의 도보여행길. 검은 돌담에 둘러싸인 마을길을 꼬닥꼬닥(천천히를 의미하는 제주도 사투리) 걷다보면 망사리를 둘러맨 잠수복 차림의 해녀들을 만나게 된다. 숨비소리는 물질을 마친 해녀가 수면 위로 올라올 때 내쉬는 소리를 일컫는 말.

2007년 9월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에서 출발하는 1코스를 개장한 이래 5년 2개월 만에 제주도를 한 바퀴 걷는 도보여행길을 완성한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이 앞장을 섰다. 4년 동안 탐사대장을 맡아 올레길을 개척한 남동생 서동성씨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옛날에 봉화대가 있었다는 연기동산을 오른다.

하얗게 탈색한 억새가 격렬한 춤을 추는 연기동산은 맑은 날에 전남 완도의 청산도 남쪽에 위치한 여서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숨은 명소. 나지막한 연기동산 아래로 올망졸망 처마를 맞댄 마을이 펼쳐진다. 마을을 벗어나자 당근과 무가 파릇파릇 자라는 들길을 걷는다. 그리고 들길이 우측으로 굽는 곳에서 지난여름에 세운 비석 한 기를 만난다.

비석의 주인공은 이곳에서 태어난 비바리와 결혼한 부산 출신의 김모씨. 풍경이 아름답고 인정이 많은 면수동에서 살고자 소망했으나 지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해 사후에 이곳에 모신다는 애절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제주도의 무덤은 일반적으로 봉분을 쓰고 마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사각형으로 돌담을 쌓는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면수동의 무덤들은 봉분 없이 비석을 세운 것이 특징.

밭담 사이를 걷던 길은 이내 바닷가 별방진 마을로 진입한다. 하도리의 별방진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1510년에 쌓은 둘레 1008m, 높이 4m의 성곽. 성곽을 축성하던 해에 흉년이 들어 동원된 장정들이 인분을 먹어가며 성을 쌓았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전해오는 현장이다.

별방진의 성곽은 제주도의 온갖 돌담을 한곳에서 볼 수 있는 명소.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별방진은 성담, 성담 아래 샘터를 둘러싼 삼각형의 돌담은 우물담, 원색의 슬레이트집을 둘러싼 담은 집담이다. 그리고 온갖 채소들이 자라는 밭을 둘러싼 밭담, 무덤을 둘러싼 산담이 거미줄처럼 뻗어나가며 한라산을 향한다. 반면에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고 불을 쪼기 위해 돌담을 쌓아 만든 불턱과 바다에 돌담을 쌓아 안에 갇힌 물고기를 잡았던 원담은 시리도록 푸른 바다를 향해 뻗어나간다.

별방진을 벗어난 제주올레 21코스는 농로를 따라 걷다 처음으로 바다를 만난다. 바닷가 도로변에는 누군가 돌을 하나씩 정성스럽게 쌓아올려 탑을 만들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탑은 바닷가에도 있다. 건듯 바람이라도 불면 허물어져 내릴 것처럼 위태로운 돌탑을 만든 사람은 바로 앞에 위치한 석다원의 주인. 석다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제주도 방문길에 이곳에서 칼국수를 맛봤다고 해서 유명해진 음식점이다.

묵묵부답 앞만 보고 올레길을 걷던 서명숙씨가 혼잣말처럼 불쑥 한마디 던진다. “걷는 것은 자기와의 만남입니다. 느리게 걷다보면 결국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서 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해답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이지요. 걷기 한 번으로 인생이 바뀐 사람이 많은 이유입니다.”

걷기 한 번으로 인생이 바뀐 사람은 바로 서명숙씨 자신이다. 그녀는 23년 기자생활을 때려치우고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을 걷다 고향 제주를 떠올렸다. 달랑 배낭 하나 둘러메고 모자를 눌러 쓴 채 제주도의 해안과 중산간을 누빈 지 어언 6년. 그녀가 걸으면서 개척한 422㎞ 올레길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로 자리 잡았다. 전국적으로 걷기 열풍이 불고 일본에서는 ‘올레길’을 수입했을 정도.

여름이면 하얀 문주란 꽃이 섬을 뒤덮어 하얀 토끼처럼 보인다는 토끼섬을 지나자 작지만 깨끗한 하도해수욕장의 백사장이 발길을 잡는다. 해수욕장 건너편 드넓은 철새도래지에는 까만 점으로 변한 수만 마리의 청둥오리가 오후의 햇살을 즐기고 있다. 긴 그림자와 함께 휘적휘적 걷던 그녀가 눈앞의 나지막한 오름을 향해 들길로 들어선다. 제주의 땅끝이라는 뜻을 지닌 지미봉이다.

예로부터 고구마 모양의 제주도에서 머리는 한경면 두모리(頭毛里), 꼬리는 구좌읍 종달리의 지미봉(地尾峰)이라고 했다. 제주올레길은 서귀포시 시흥(始興)에서 시작해 제주시 종달(終達)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조선시대 때 새로 부임한 제주목사가 섬을 한 바퀴 도는 탐라순력을 나설 때도 시흥에서 시작해 종달에서 끝났다고 한다.

제주도의 동쪽 끝 바닷가에 우뚝 솟은 지미봉의 높이는 해발 165m. 북쪽에서 보면 두 개의 봉우리로 보이는 지미봉은 가파른 대신 높지는 않아 몇 번 숨을 헐떡이고 나면 봉수대가 있던 정상에 서게 된다. 지비봉 정상은 제주올레 시작점인 시흥초등학교를 비롯해 말미오름, 우도와 성산일출봉, 용눈이오름과 다랑쉬오름 등 제주의 동부지역 오름 군락이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해뜰 때와 해질 때, 맑을 때와 흐릴 때, 근경과 원경, 그리고 춘하추동의 풍경이 저마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름다운 지미봉 정상에서 만나는 풍경에 대해 서명숙씨는 “올레길 422㎞를 완주한 올레꾼들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자 최고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이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그녀는 6년 동안 때로는 거센 바람을 때로는 따가운 햇살을 맞으며 걷고 또 걸었던 것이다.

지미봉에서 하산한 제주올레 21코스는 에메랄드 색에서 코발트블루로 짙어가는 종달리의 바닷가를 1㎞쯤 더 걷는다. 그리고 작고 아름다운 백사장이 보이는 종달리 바닷가에서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제주도=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