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차피득 (11) 내가 직접 체험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들

입력 2012-11-20 17:54


내가 지금 섬기는 신흥교회는 1953년 북한 평북 선천, 철산지역에서 온 피란민들이 세운 교회다. 그래서 이름도 평북교회였다. 교회는 1961년 평북교회(현 평광교회)에서 분리돼 서울 용산동 산2번지에 아버지인 차희선 장로와 102명이 창립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됐다. 아버지가 평북교회 설립멤버였지만 나는 영락교회도 함께 다녔다. 영락교회에 가면 북한에서 내려온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62년 겨울의 일이다. 우리 교회는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개최했다. 조 목사님이 지금처럼 유명하지 않을 때이니 우리 교회처럼 조그만 곳에서도 부흥회를 1주일 동안 개최할 수 있었다. 부흥회는 열기가 대단했다. ‘야, 젊은 강사 목사님 정말 설교 잘하네.’ 문제는 부흥회 사흘 째 되는 날 발생했다. 아침부터 목이 뜨끔뜨끔하더니 침도 제대로 못 삼켰다. 몸이 오슬오슬 떨렸다. 매년 겨울이면 찾아온 목감기가 어김없이 온 것이다. 나는 그 당시 겨울바람만 쐬면 목감기에 걸리는 게 연례행사였다. 집에서 두툼한 이불을 뒤집어쓰고 땀을 내고 있었다.

“차 장로님, 차피득 집사는 왜 안 나왔습니까?” 당시 교회를 담임하시던 김성억 목사님께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예, 겨울만 되면 목감기에 걸리는데 편도선염으로 집에서 앓고 있습니다.” 김 목사님은 그 길로 조 목사님과 함께 해방촌 가파른 언덕을 넘어 우리 집까지 오셨다. 김 목사님과 조 목사님, 아버지는 내 머리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를 시작했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차 집사의 육신의 질병을 치료해 주십시오.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차 집사를 묶고 있는 질병의 고통은 떠나갈지어다!”

기도 후에도 나는 온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워서 이불을 쓴 채 끙끙 앓기만 했다.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저녁 집회시간이 다가올수록 점점 몸이 홀가분해졌다. 그래서 오후 7시 저녁집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날로 연례행사처럼 거쳐 가던 편도선염은 평생 사라졌다. 할렐루야! 그때 하나님께서 직접 질병을 고쳐주신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아버지는 80세가 넘어서도 철저하게 새벽제단을 쌓으셨다. 교회가 있던 남산 기슭 해방촌은 급경사여서 눈이라도 오는 날이면 미끄러워서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새벽기도회를 포기할 아버지가 아니었다. 눈 오는 날이면 아버지는 새벽기도용 구두를 신으셨다. 신발 바닥에 못을 박아놓은 구두였는데 요즘으로 따지면 등산용 아이젠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도 빙판이 심해 교회에 못 가시게 되면 교회 가는 도중에 전봇대를 붙잡고 기도를 하시곤 했다. 아버지는 수석장로로서 교회사랑이 남달랐다. 1963년 교회 건축을 할 땐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소량이지만 벽돌도 나르고 돌도 깨곤 하셨다. 아버지는 1971년 장로에서 은퇴하셨으며, 이듬해 12월 6일 84세를 일기로 소천하셨다. 특별한 유언을 남기시지 않았지만 통일이 되면 당신의 고향인 선천 가물남에 교회를 재건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늘 하시곤 했다. 건강이 좋지 않으셨던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7년 먼저 돌아가셨다.

1973년 회사명을 앤스코양행에서 대호무역으로 변경했다. 미국의 필름회사였던 앤스코가 없어지면서 일본과 거래를 트다 보니 회사명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크게 보호해 주신다’는 뜻에서 대호로 결정했다. 사업은 시간이 갈수록 쭉쭉 뻗어나갔다. 자녀의 복도 주셔서 네 명의 아들을 뒀다. 1975년 장로로 장립된 나에게 큰 시련은 신흥교회 새 성전 봉헌에 한창이던 1979년 닥쳐왔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