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의 시편] 불편한 생존, 편안한 죽음
입력 2012-11-20 17:47
의학의 발달은 사람의 수명을 늘려주었을 뿐 아니라 더 건강하고 편안하게 살게 하는 등 삶의 질을 높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목사로서 환자들을 돌아보아야 할 때가 많습니다. 심각한 질병 등으로 치료를 받는 분들을 위로하고 회복을 기도해 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역입니다. 그런 사역을 하면서 의료진이 어려운 환자도 어떻게 하든 살리려고 필사의 노력을 하는 모습을 보면 참 감동입니다. 목사로서 맡겨진 양들의 영적 치유를 위해서 얼마나 힘을 기울이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고민이 되는 상황도 많습니다. 도무지 살아날 가능성도 없고 혹시 살아나서 몇 달이나, 몇 년 더 산다 하더라도 삶의 질은 바닥을 헤맬 것이 분명한 데 단순한 연명을 위해 의도와 다르게 환자를 더 힘들게 만드는 경우, 의사 표시도 못하는 환자의 인권이 생명 연장을 해주는 것으로 지켜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 고민입니다. 오히려 평안하게 놔 드리는 것이 환자에 대한 도리요, 그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때 갈등하게 됩니다.
좀 더 냉철하게 생각해 보면, 겨우 목숨은 건졌다 해도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인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렇게라도 살려 놓는 것이 의술의 목적이고 의사의 최선일까요. 정말 인간다움을 추구한다면 하나님께서 오라 하시는 때에 편안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무의미한 연명이 과연 가치 있는 것일까요. 자녀들 마음 편하자고 또는 주변의 시선 의식해서 이런저런 의료적 조치를 해놓고 마냥 기다리며 서로 힘들어지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일까요. 현대 의학의 힘이 아니면 이미 떠났어야 할 사람이 인공호흡기를 비롯한 온갖 생명연장 도구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원하시지 않는 것이 확실합니다.
결국 우리들의 죽음에 대한 자세가 문제입니다. 죽음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과연 죽음을 놓고 웃을 수 있을까요. 목회자면서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죽음을 기꺼이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나 스스로를 진단하며, 자신감 넘치는 삶뿐 아니라 주저하지 않고 떠날 정도로 죽음과 친해지고 싶습니다.
바울 사도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빌 1:23) 염세적인 인생관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 많은 사람이 나로 인해 유익할 것”이라고 했던 그는 죽음이 가슴 설레게 할 만큼 복된 것임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것보다 죽음이 훨씬 좋다는 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고 싶습니다. 이럴 때 떠나는 사람이나 떠나보내는 사람 모두가 행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산정현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