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흔은 알고 있다, 그날 그가 무슨 짓 했는지… ‘범죄의 재구성’ 과학수사의 세계

입력 2012-11-19 21:29


지난 4월 4일, 대전 동구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최초 목격자 이모씨는 “사건 현장에 갔을 땐 이미 집주인 김씨가 피를 흘린 채 숨져 있었고 또 다른 김씨도 중태였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사건 발생 다음날 이씨 집 세탁기에서 혈액이 묻은 옷이 발견됐다. 이씨는 “사건 전날 숨진 두 명의 남성과 노름을 하다가 이들이 심하게 다퉈 이를 말리는 과정에서 묻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씨는 평소 김씨 집을 자주 드나드는 사이여서 이씨의 지문도 범행을 입증할 수 없었다.

현장에 파견된 경남청 과학수사계 손부남(38) 경사는 이씨 옷에 묻은 혈흔이 작은 원형 모양으로 흩뿌려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런 모양의 혈흔은 둔기로 맞을 때 튀면서 발생하는 형태라는 것이다.

손 경사는 “말리는 과정에서 옷에 묻는 것과는 전혀 다른 혈흔”이라며 증거로 제출했다. 경찰은 사건 발생 7개월 만인 지난 7일 이씨를 살인 혐의로 구속했다.

지난 4월 19일 경남 사천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피의자 강모(28)씨는 숨진 최모(35)씨와 몸싸움을 벌였지만 살해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강씨의 범행을 입증할 증거가 없어 애를 먹고 있는데 강씨 옷에 묻은 혈흔에서 최씨의 타액이 발견됐다. 숨진 최씨가 기관지에 고여 있던 피를 토해내면서 강씨 옷에 타액을 묻힌 것이 틀림없었다. 최씨가 숨질 때 강씨가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는 의미다. 결국 강씨는 혈흔 하나 때문에 혐의가 인정돼 구속됐다.

살인사건 피의자 백모(48)씨의 경우도 혈흔 분석이 결정적인 증거로 채택돼 징역 15년이 선고됐다. 경찰은 재판에서 “피해자의 혈흔을 분석해 보면 대문 근처와 방 안, 두 군데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폭행이 이뤄졌다”며 “통상 비면식범은 범죄 후 서둘러 현장을 피하는 점으로 미뤄 면식범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피해자는 대인관계가 좁아 아는 사람은 백씨가 거의 유일했기 때문에 면식범의 소행이란 증거가 나오면 용의자는 백씨가 분명해지는 상황이었다. 백씨는 끝까지 자신이 범행 현장에 없었다며 무죄를 주장했지만 결국 창원지법은 혈흔분석을 더 신뢰했다.

최근 과학수사에서 혈흔 분석 기법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중요성 때문에 국내에서도 지난해 8월 혈흔형태분석연구모임(WGBPA)이 만들어져 혈흔분석 전문가 양성이 시작됐다. 현재 경찰관 16명, 국립과학수사연구원 4명, 군 관계자 3명, 대학 교수 1명, 해경 1명 등 총 25명이 활동하고 있다.

모임 회장인 박기원 국과수 연구원은 “혈흔은 범죄 현장에 가장 많이 남겨진 증거 중 하나”라며 “혈흔분석관들은 혈흔을 토대로 현장 상황을 재구성해 사건의 중요한 단서를 얻는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혈흔이 가장 빨리 발생한 장소와 많이 묻은 곳, 혈흔의 형태 등을 분석한다. 이를 토대로 사건이 어디에서 발생해 어떤 순서로 벌어졌는지, 현장에 누가 있었는지, 현장에 있는 물건은 어디로 이동했는지 등을 판단한다.

혈흔의 형태에 따라 범인이 사용한 범행 도구도 알 수 있다. 흉기를 사용하면 폭이 좁은 타원형의 혈흔이, 둔기를 휘두르면 둥근 원 형태의 흔적이 남는다. 혈흔으로 ‘범죄의 재구성’이 가능한 것이다.

최용석 경찰청 과학수사계장은 “과거에는 범죄가 발생하면 신원확인, 지문 검색 등이 전부였지만 지금은 혈흔까지도 정밀하게 분석해 범죄를 입증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