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차피득 (10) “내 사업을 해보자” 마침내 앤스코양행 설립

입력 2012-11-19 18:11


내 일생에 절대 잊을 수 없는 큰 실수는 1958년에 발생했다. 군대에 있을 때 큰 도움을 받았던 상관인 한모 중사가 제대 후 처음으로 나를 찾아왔다. 자신의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480만원짜리 국고 수표 한 장을 내놓고 할인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과거 군 시절 큰 신세를 졌던 터라 신세를 갚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의심 없이 즉석에서 승낙했다. 부도가 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발 벗고 나서서 도와야겠다는 일념에 덥석 할인해준 것이다. 어음 지급 날짜에 한국은행에 가서 어음을 제시했더니 황당한 답변이 돌아왔다. “위조 수표입니다.” 사기를 당한 것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당시 내 월급이 8000원이었는데 위조수표는 지금으로 따지면 5억원이 넘는 큰돈이었다. ‘아, 내 운명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친한 친구, 친척, 내 신용을 총동원해서 할인해 준 것인데….’ 어쨌든 순간의 실수로 떠안은 큰 빚을 7년간 사력을 다해 갚았다. 하지만 이로 인해 우리 식구들은 끼니를 제대로 못이어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사회경험 부족과 무식의 결과가 이렇게 엄청날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내가 다니던 동원무역은 일본에서 화공약품을 수입해 각 공장에 공급하는 수입회사였다. 여기서 3년을 근무하면서 무역 업무를 배웠다. 배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배운 셈이다. 그 당시만 해도 무역은 일종의 기술로 여겨지던 때였다.

다음에 근무한 회사는 합동도서라는 인쇄회사다. 여기서 10년을 보냈다. 39세가 되던 해 ‘40세가 되기 전에 독립을 해 월급쟁이를 면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업종을 골랐다. 하지만 세상의 그 많은 직종 중 내가 할 수 있는 직업이 단 하나도 없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좌절감이 몰려들었다.

아버지는 “네가 하는 일 중에서 한번 찾아보라”고 조언하셨다. 내가 좀 안다는 것은 무역, 경리, 인쇄와 관련된 일이었다. 이것이 모두 합쳐지는 것이 인쇄용 필름을 수입해서 인쇄회사에 공급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1965년 앤스코양행을 설립했다. 마침 초등학교 동창인 박일력이란 친구가 자기도 이 사업에 동참하겠다고 나섰다. 그 해 연말이 돼 1년 장사한 결과를 결산해보니 그 당시 사채 이자 수준인 월 5% 정도의 이익을 냈을 뿐이었다. 크게 실망했다. 동업으로 투자한 박일력이 출자한 100만원을 모두 빼 달라고 해 돌려줬다. 나는 이 사업이 장래가 없다고 단정짓고 다시 전 회사에 복직하겠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께서는 정색을 하셨다. “어떻게 첫 술에 배부를 수 있느냐. 장사 시작하자마자 적자가 난 것도 아니고 이익이 났는데 대 성공이지. 절대 실패가 아니다. 중국 상인은 30년은 해보고 ‘된다, 안 된다’를 결정한다. 사과나무도 심어서 3년이 지나야 열매를 볼 수 있는 것이다. 2년만 더 해 보거라.”

그 다음해에 장사가 썩 잘 되어서 내 자본금만큼의 돈을 벌 수 있었다. 장사 밑천은 2배로 늘었다. 그때 장사의 묘미를 처음 느꼈다. 아버지의 한마디 말씀이 내 일생을 돌려놓은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필름 장사가 올해로 47년이나 됐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세상이 변해가면서 필름의 수명이 다해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내가 하는 업종이 지구상에서 수명이 다할 때까지 현장에서 뛸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