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김명호] 베버가 대선을 보고있다면
입력 2012-11-19 19:26
독일의 막스 베버가 정치 지도자가 꼭 갖춰야 할 자질로 열정, 책임감, 균형적 판단을 꼽은 것은 93년 전(1919년)이다. 당시 뮌헨 대학에서 암울한 독일 정치상황에 적극 뛰어들려는 학생운동 단체를 상대로 한 강연에서였다.
그해 10월 이 강연을 바탕으로 엮은 책이 유명한 ‘소명으로서의 정치’이다. 그는 저서에서 정치가의 필수 자질로 이 세 가지를 꼽으면서, 아무리 순수하더라도 열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했다. 뛰어난 정치가라면 책임감이 열정에 더해져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일반적으로 표현되는 정치인과는 수준이 다른 정치가를 뜻하는 것이다.
거기에 하나 더, 균형적 판단이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균형적 판단을 ‘정치가가 가져야 할 매우 중요한 심리적 자질로, 내적 집중력과 평정 속에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바꿔 말하면 사물과 사람에 대해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이라고 설명했다.
정치가의 세가지 필수 자질
대권을 향한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의 기묘한 레이스는 구경꾼 입장에서 참으로 흥미롭다. 단일화를 야합이라고 치부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정치혁신과 변화를 이뤄내기 위한 과정으로 보는 쪽도 있다. 문재인과 안철수가 18일 밤 극적으로 단일화 갈등을 풀었지만, 단일 후보를 거머쥐기 위한 물밑 싸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세 사람은 보통 정치인들과는 다른 뛰어난 장점들이 있다. 일관된 원칙과 신뢰감이 강점인 박근혜, 진정성이 느껴지고 서민적인 문재인, 미래지향적이고 혁신이 트레이드마크인 안철수.
정치를 하면서, 국정에 참여하면서, 공익을 위한 기업을 하면서, 그리고 지금까지 대선 과정에서, 세 사람은 베버가 꼽은 세 가지 중 열정과 책임감이라는 정치가의 자질을 상당한 수준으로 보여줬다. 그러면 균형적 판단은?
균형적 판단 능력은 보기 나름이다. 평가하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념적으로 서 있는 위치가 다르면 평가 기준이 달라진다. 직접 이해관계가 얽히면 시각은 뚜렷이 상반된다.
박근혜가 발표한 경제민주화 방안에는 대기업집단법 제정과 기존순환출자금지의 의결권 제한 부분이 빠졌다. 대기업들은 웃었고, 반대편 사람들은 불만이다. 나아가 대기업들은 경제민주화 자체가 잘못된 방향이라고 주장한다. 새누리당의 김종인과 비슷한 생각이거나 대기업에 피해를 보고 있다고 여기는 쪽은 그 반대 시각이다.
문재인과 안철수가 합의한 새정치 공동선언 내용은 혁신적이다. 정치가 더 이상 바닥이 없을 정도로 불신에 빠진 지금,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는다. 하지만 박근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추상적이고 말로만 하는 정치’라고 반격한다. 실제로 의원정수를 줄이고, 정치 기능을 줄인다고 치자. 이런 주장의 취지는 일리가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정치 공백은 노회한 전문 관료의 득세, 의회 견제기능의 무력화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베버도 이 같은 우려를 지적했었다.
균형적 판단 잘할 후보는?
‘균형적 판단을 잘 할 수 있다’는 자질은 대선 결과를 가를 수 있는 최대 요소다. 왜냐하면 12월 19일의 승부는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이 쥐고 있다. 박근혜의 경제민주화 강조, 문재인의 친노색깔 탈피, 안철수의 장기간 지지도 유지는 중도층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의 특징은 탈(脫)이념, 균형 감각, 적절한 변화 욕구 등이다.
93년 전, 균형적 판단을 ‘사물과 사람에 대해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이라고 설명한 베버는 다시 이렇게 경고한다. ‘거리감의 상실은 어느 정치가에게나 치명적인 죄과(罪過)이다.’ 베버가 살아있어 한국 선거를 지켜본다면 세 후보의 균형적 판단 능력에 각각 어떤 점수를 줄까.
김명호 편집국 부국장 m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