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샘] 자수성가한 천민 유희경

입력 2012-11-19 19:13

山含雨氣水生煙

靑草湖邊白鷺眠

路入海棠花下去

滿枝香雪落揮鞭

산은 우기를 머금고 물안개는 피어나는데

청초호 가에는 백로가 잠들어 있다

해당화 아래로 길을 지나가노라니

가지 가득 향기로운 눈이 채찍질에 떨어진다

유희경(劉希慶·1545∼1636) 월계도중(月溪途中) ‘촌은집(村隱集)’


얼굴처럼 시에도 마음의 표정이 있다. 비 기운을 머금은 산과 물안개, 호숫가에 졸고 있는 백로에 한가롭고 맑은 마음이 투영되어 있다. 해당화가 핀 길로 지나가는 말, 휘두르는 채찍에 해당화가 눈처럼 흩날린다. 밝은 표정에 감미로운 풍미와 고상한 낭만이 비친다.

유희경은 천민이었다. 박순에게 당시를 배워 명사들과 교유하였고 서경덕의 문하인 남언경에게 가례를 배워 사대부들이 상이 나면 모두 그에게 예를 물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이 70에도 상갓집 일꾼이 되어 굶주린 채 곡읍하는 자리에 나가야 했다. 유희경의 전(傳)을 쓴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식자들이 애처롭게 여긴다는 말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유희경은 이이첨의 인목대비 유폐에 동조하지 않았기에 인조반정 이후 종2품 가의대부에 올랐다. 그 후 92세까지 살았고 문집을

남겼다. 그가 사대부들에게 대접을 받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13세에 아버지 상을 당해 손수 무덤을 만들고 시묘살이를 했으며, 30년 동안 병석에 누운 어머니의 대소변을 받아 빨래를 하고 그 옆에서 책을 보았다. 임란 때 의병활동도 했다. 문집 서문을 쓴 김창협 등 당대의 명사들도 이를 주목했다. 그가 도봉산 자락에서 천인 백대붕 등과 시회를 만들고 ‘침류대시첩(枕流臺詩帖)’을 남긴 것만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부안의 기생 매창(梅窓)이 유희경을 만나 28세라는 나이차를 초월해 시와 사랑을 나눈 것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는가/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노라.

유희경이 떠난 뒤 매창이 남긴 시조이다. 둘 다 천인으로 태어났지만 시로, 아름다운 사랑으로 향기로운 이름을 세상에 남겼다.

김종태(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