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김경집] 서울역에 노숙자文庫를!

입력 2012-11-18 20:00


한 해가 채 달포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또 한 해가 저문다. 올해는 ‘책의 해’이다. 그러나 책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잘 모른다. 정부가 아무런 대책이나 지원도 하지 않고 그렇게 표어로만 남기며 빛바랜 상태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시거든 떫지나 말고 동냥은 못 줄망정 쪽박은 깨지 말라더니 지원은커녕 초대 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에 대통령과 동문인 언론인 출신을 임명하여 오히려 출판인들의 속을 부글부글 끓게 했을 뿐이다.

책 읽지 않아도 태연하게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다. 갈수록 책을 읽지 않는다. 출판사들도 이런 세태에 뒤로 나자빠진다. 말로만 ‘책의 해’일 뿐 상황은 악화되고 있다. 그러나 그날이 멀지 않다. 독서력이 경쟁력이 되는 시기가 곧 온다. 쏟아지는 파편 같은 나부랭이 지식 쪼가리들이 아니라 긴 호흡의 책이 주는 힘의 중요성을 깨닫는 시간 말이다. 책은 지식만 주는 게 아니다. 책은 우리의 굳은 감성도 풀어준다. 책의 힘 가운데 중요한 것은 바로 주체성과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이다. 아무리 누가 옆에서 떠들어도 그건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책을 읽는 것은 바로 ‘자유롭고 주체적인 나’ 자신이다.

그들의 자존감 살리는 지름길

그런 까닭에 정말 책이 필요한 사람들은 바로 서울역 등에서 하루하루를 때우는 노숙인들이다. 그들도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와 함께 당당하게 일하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떨려나고 밀려나 삶에 대한 희망도 자존감도 모두 놓아버리고 그곳에 흘러들어왔을 뿐이다. 사지 멀쩡한데 왜 몸 놀려 일하지 않느냐고 핀잔하지만,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처사이다. 자존감도 희망도 없는데 그깟(?) 일당 받아서 무엇 하겠는가. 아무리 밀어내도 그들은 그곳에서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서울역에 노숙인들을 위한 책장을 만들어보자. 그 책 뽑아다가 베개로 삼아도 좋고 추울 때 땔감으로 써도 좋다. 다시 채워주면 된다. 심심해서 그 책 읽다가 어느 대목에서 콧날이 시큰해지면 왜 자신이 그곳에 있어야 하는지 스스로 깨닫고 몸과 마음 추슬러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 때문에 무서워하는 여성들도 책 읽는 노숙인들은 덜 무서울 것이다. 게다가 공항철도에서 내린 외국인들의 서울 첫 인상도 ‘책 읽는 노숙인’이라면 “한국에서는 노숙인들도 책을 읽더라”며 놀라움을 전할 것이다. 그런 게 요즘 흔히 말하는 국격이다. 제 거짓과 잘못 찾아내겠다고 압수수색하고 특검 연장하겠다고 하니 멍청하게 국격 운운하면서 거부한 작자들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그런 ‘나라의 품격’ 말이다.

마음 추슬러야 떠날 수도 있어

이런 제안에 대해 그런 시설이 자칫 시 당국이 노숙인 집합소를 공식화하는 것 아닐까 싶어 걱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시설물이 아니다. 그들에게 자존감을 되돌려줘서 그곳을 떠나 자신의 삶을 되살려야 한다. 그게 진짜 멋진 시정이다. 등 떠밀고 빗자루로 위협한다고 떠날 사람들이 아니다. 어차피 희망을 포기한 세상이 무에 그리 겁나겠는가. 그들에게 책을 주자. 또한 서울역 앞에서는 노숙인들도 책을 읽더라는 소문이 나라 안팎으로 퍼진다면 그것이야말로 겨울을 이겨내는 매화 향기보다 더 아름답지 않을까.

‘책의 해’인데도 책도 읽지 않고 팔리지도 않는다고, 정부는 엄한 뻘짓이나 하느라고 이런 일에는 관심도 없고, 시도 무관심하다고 애석해하기만 할 일이 아니다. 대합실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승객도, 역사 근처의 노숙인들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과연 말도 되지 않을 꿈일까. 그런 꿈은 백 번 꿔도 좋다. 백일몽이 아닌 다음에야! 그러니 서울역 광장에 노숙인문고를 만들어보자. 더 추워지기 전에. 폭설과 한파도 꺾지 못할 매화향을 퍼뜨려보자.

김경집(인문학자·전 가톨릭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