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차피득 (9) 1955년 영원한 신앙의 멘토 아내와 첫선을
입력 2012-11-18 18:21
아내를 만난 것은 1955년 8촌 형님 덕분이다. 형님은 경기도 청평에서 청평교회를 섬기며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아내를 눈여겨봤던 것이다. 당시 우리 가정의 형편은 무척 어려웠다. 칠순 노인을 모시고 있던 23세 가장이었던 나는 장가간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어느 날 8촌 형님이 찾아왔다. “피득아, 어서 빨리 장가를 가야 하지 않겠냐.” “아이고 형님, 제 형편을 보고 좀 말씀하세요. 이런 형편에 누가 우리 집에 시집을 오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아직도 공부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부모님 연세가 칠십이 넘었는데 빨리 장가가서 며느리 손에 진지를 드려야 하지 않겠냐.”
형님은 우리 집에 여러 번 와서 생각해 둔 색시가 아주 참하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바느질을 썩 잘하고 성실해서 돈도 많이 벌어들일 것이라고 장담했다. 드디어 결심을 굳혔다. 청평으로 선을 보러 갔다. 어머니와 함께 가야 했지만 아프셨기 때문에 이모님과 숙모님이 같이 움직였다. 처녀의 조그마한 집에서 우리 셋과 처녀 쪽 할머니, 아버지, 오빠, 그리고 8촌 형님이 모여 앉았다. 쑥스러워 처녀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마침 그날이 주일이었다. 청평교회에서 저녁예배를 드리고 나오는데 이모님이 다그쳤다. “어떠냐. 내가 보기엔 참한데.” “글쎄요. 제 일생에 중요한 문제 아닙니까. 정면으로 얼굴도 잘 못 봤고 말 한마디 못했으니 어떻게 결정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난감했다. 처녀를 한 번만 더 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윽고 교회에서 성가대 연습을 하고 있던 처녀가 나타났다. 용기를 냈다. 더 이상 체면 같은 것을 생각하다간 일을 그르치고 말 것 같았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의 집은 매우 가난합니다. 형님은 전쟁 중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고 북쪽에 계신 누님은 생사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독자처럼 노부모님을 모시고 삽니다. 더욱이 어머님은 병석에 계시기 때문에 정성껏 모셔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제야 처녀의 얼굴을 봤다. 어렵겠다는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처녀의 반응은 침착했다. 그리고 또렷하게 말했다. “그런 건 모두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후 우리의 사랑이 시작됐다. 동원무역 경리 말단이던 나는 주일이면 청평을 열심히 찾았다. 편지는 이틀이 멀다하고 띄웠는데 처녀에게 하도 많은 편지가 가니 우편배달부가 연애편지라는 것을 눈치 채고 늘 웃으면서 배달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해 5월 26일 내가 섬기는 평북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아내는 당찬 여인이었다. 처가는 장인어른의 술버릇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그래서 아내는 술 마시는 남자에게 절대로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런데 교회에서 예수를 믿으면 술을 먹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19세 때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때 당시 청평교회는 강원모 목사님이 담임하고 계셨는데 청평교회에 나가기로 결심하고 당당하게 아버지께 승낙까지 받았다고 한다. 아내는 온 가족을 교회로 인도했다. 술독에 빠졌던 장인어른은 훗날 새벽기도를 하루도 빠지지 않는 장로가 됐다. 아내는 나보다 신앙이 좋았다. 남편의 사업과 자녀를 위해 기도의 제단을 쌓았다. 그녀의 기도제목은 소박하게도 두 가지뿐이었다. “허황된 거짓말을 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하지 마시고 먹고살게만 해주세요. 가난하면 도둑질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렵고, 배부르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잊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