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45) 윌리엄 브래드포드의 발자취를 따라
입력 2012-11-18 18:30
신대륙에 미국 탄생 씨앗 심고 추수감사∼
추수감사절을 맞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에 정착한 청교도들을 생각한다. 미국에 있을 때 보스턴 근교에 있는 매사추세츠 주립공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모형 메이플라워호에 올랐을 때 생각보다 배가 작고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 어떻게 그 작은 배에 102명이나 탔을까? 그때 기억에 남은 사람이 윌리엄 브래드포드다. 그는 30세의 젊은 나이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도착하여 33년간이나 플리머스 주지사로서 정착 초기의 미국을 인도했다. 추수감사절을 처음 시작한 것도 그였다. 브래드포드는 누구인가? 오랫동안 브래드포드의 발자취를 찾고 싶었었다.
청교도 신앙과의 만남
브래드포드의 신앙 역정은 영국 게인스보로에서 시작된다. 청교도 목회자 존 스미스가 최초로 목회를 시작한 곳이다. 존 스미스는 결국 그곳에서 청교도 목회 때문에 쫓겨나 네덜란드로 간다. 다음 도착한 곳이 밥워스. 그곳에서 젊은 브래드포드를 만났다. 큰길에서 약 400m를 걸었더니 숲이 나오고 숲 속에 낡은 교회 하나가 보였다. 그 교회가 바로 올 세인트 교회. 때마침 내린 비로 교회는 을씨년스러웠다. 그러나 안내자의 설명을 듣고 곧 옷깃을 여미었다. 그 교회는 유명한 청교도 4인방이 신앙의 자유와 올바른 교회를 꿈꾸며 기도했던 곳이다. 리처드 크리프톤, 윌리엄 브루스터, 존 로빈손, 그리고 윌리엄 브래드포드가 그 4인방이다.
당시 청교도는 두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영국교회 안에 남아 개혁하자는 개혁파와 이들과 분리하여 새로운 교회를 세우자는 분리파. 분리파에게 사상적 영감을 준 사람이 리처드 크리프톤이다. 그는 이곳에서 목회할 때 함께했던 청년이 윌리엄 브루스터와 윌리엄 브래드포드였다. 당시 브래드포드는 20대 청년.
그는 영국 북쪽 오스터필드에서 부유한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삼촌들 밑에서 자라는 동안 잦은 병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 질병 때문에 신앙에 눈을 떴고 청교도 신앙과도 만날 수 있었다. 청교도 목회자 리처드 크리프톤과 만난 것은 그의 일생에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는 친구의 초청으로 리처드 크리프톤이 인도하는 청교도 예배에 참석, 설교를 듣고 믿음의 확신을 가졌다. 크리프톤이 청교도 사상 때문에 올 세인트 교회에서 쫓겨나 스크루비 교회로 가자 그도 따라갔다. 밥워스에서 7㎞쯤 떨어진 스크루비로 향했다. 스크루비는 평범한 시골풍 교회로서 교회의 모습은 남아 있지만 지금은 교회로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 교회가 중요한 것은 분리파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로 출발한 곳이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나그네의 땅
브래드포드 일행은 어떤 길을 따라 네덜란드로 떠났는가? 안내자를 따라간 곳은 이밍함과 보스톤이었다. 물줄기를 따라 항구로 이어지는 작은 강둑에서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지의 길을 떠났다. 보스톤에는 커다란 기념비가 받침목으로부터 끝이 뾰족하게 솟아 있는 화살모양으로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기념비에는 “후에 필그림 파더스라고 불리게 된 사람들이 바다 건너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으려는 첫 시도를 1607년 9월 이 근처에서 감행했다”라고 쓰여 있다.
브래드포드는 1609년 크리프톤, 브루스터 등의 스크루비 교인들과 함께 이곳을 떠나 네덜란드 라이덴에 도착했다. 그는 1612년 라이덴 시민권을 획득하고 회중 내에서 높은 지위도 얻었다. 1613년에는 도로시 메이와 결혼하여 4년 후 아들 존도 낳았다. 그러나 안락한 생활의 네덜란드도, 그에게는 먼 순례지를 향한 나그네의 땅이었다. 그는 이주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네덜란드화되어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스크루비의 교인들과 함께 또 한번의 결단을 해야 했다. 그것은 신세계로의 모험에 찬 이주였다.
스피드웰과 메이플라워
1619년 봄 그는 상속받은 집과 재산을 팔아 이주자금을 마련했다. 그리고 두 척의 배를 마련했다. 스피드웰과 메이플라워호였다. 두 배는 네덜란드를 떠나 영국 사우샘프턴을 지나 서쪽으로 120㎞ 떨어진 다트머스 항구를 향해 출항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발생했다. 스피드웰호가 고장 난 것이다. 돛에 바람이 새서 속도가 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배에 물까지 새어 들어왔다. 어쩔 수 없이 플리머스 항구로 돌아와 스피드웰호는 포기하고 102명이 메이플라워호로 옮겨 탔다. 1620년 9월 20일 드디어 메이플라워호는 플리머스 항구를 출발했다. 어둡고 축축한 좁은 선실에서 5000㎞에 이르는 긴 항해가 시작되었다. 뱃멀미가 계속되었고 폭풍이 불어 닥쳤다. 메이플라워호는 버지니아를 향해 출발했으나 항해사의 실수로 버지니아보다 북쪽에 위치한 매사추세츠주의 케이프콧에 도착하게 되었다.
플리머스에 정착하다
1620년 11월 11일 신대륙에 첫발을 디딘 브래드포드 일행은 플리머스를 정착지로 결정하고 12월 11일 플리머스록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린 것은 추위와 배고픔뿐으로, 먹을 만한 음식도 머물 만한 숙소도 없었다. 간혹 인디언의 괴성으로 인한 공포와 두려움만 있을 따름이었다. 브래드포드에게는 인간적인 고난도 겹쳤다. 아내가 배에서 떨어져 익사한 것이다. 그러나 슬퍼할 틈도 없었다. 1621년 1∼2월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고통을 당했다. 102명 가운데 50여명 넘는 사람이 죽음을 맞았는데 대부분 비타민C 결핍으로 발생한 괴혈병 때문이었다. 3월이 되자 황량한 허허벌판에 영국에서 가져 온 완두콩, 콩, 보리를 심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싹이 나지 않아 그해 가을까지 굶주릴 수밖에 없었다.
1621년 4월 브래드포드는 초대 정착촌장 존 카버의 후임으로 31세에 정착촌의 지도자가 되었다. 브래드포드는 어려운 시기에 정착촌 촌장이 되어 굶주림으로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고 다가올 겨울을 대비해 새로운 정착촌을 건설해야 했다. 가까스로 씨앗을 심어 가을에 얼마를 거둘 수 있었지만 그 결과는 형편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브래드포드는 한 해 동안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추수감사 절기를 가질 것을 선언하였다. 절기 동안 3일간 운동경기와 무술경연 등을 벌이면서 인디언들과 친교의 시간을 가지며 한 해 동안 박해 없이 마음껏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던 것, 어려움 가운데도 인디언 친구를 주신 것, 적은 양이지만 수확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다. 이것이 바로 추수감사절의 유래이다.
그 후 브래드포드는 1657년 영면할 때까지 아름다운 믿음의 지도자로 최선을 다했다. 주어진 권세를 자신의 영달이나 축재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았고 자신의 땅도 이민자들에게 모두 분배했다. 브래드포드를 찾아 떠난 여행의 마지막은 영국 플리머스였다. 인구 30만의 그 도시는 새로운 신앙공동체의 비전을 향해 출발한 청교도의 모험이 시작된 곳이다.
메이플라워호의 출발을 기념한 작은 기념비 앞에 섰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도 하늘을 향해 길을 떠나는 나그네가 아닌가? 나도 더 나은 신앙을 향해 매일 나를 버리고 이 항구를 떠나는가? 출렁거리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성경 구절 하나를 떠올렸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그렇다. 한 사람 브래드포드를 통해 오늘의 미국이 만들어졌다면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능력은 얼마나 위대한가? 오늘 영국을 떠나면 반드시 내일 미국의 새 플리머스에 도착한다.
<분당 한신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