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의구] 이화령 복원

입력 2012-11-16 18:40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6년 11월 옛 조선총독부(중앙청) 건물 철거 작업을 하던 중 소나무 말뚝 9388개가 발견됐다. 건물 지하에 지름 20∼25㎝, 길이 4∼8m나 되는 큰 말뚝들이 60㎝ 간격으로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과거 문헌을 조사한 결과 이 말뚝들은 백두산 부근 압록강변에서 벌목한 소나무들로 일제가 총독부 건물을 세우면서 지반 강화를 명목으로 박은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실제 목적은 조선왕궁의 기운을 누르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는 일제가 민족정기를 막고 국토의 혈맥을 끊기 위해 설치한 말뚝과 석물, 비문 등을 찾아내 철거하자는 움직임이 일던 때였다. 총독부 말뚝은 새삼 공분을 불러일으켰고, 정부는 이를 모두 제거했다. 일제 말뚝은 지금도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소백산맥 이화령에서는 15일 도로로 끊어진 고개 양편을 잇는 공사 준공식이 열렸다. 도로 위에 연장 46m의 터널을 설치하고 그 위에 흙을 덮고 나무를 심어 동물들이 오가도록 했다. 일제가 1925년 이 도로를 설치한 이후 87년 만이다. 정부는 도로로 단절된 백두대간 다른 지역 12곳도 차례로 복원할 계획이다. 1915년 일제가 옛길을 넓혀 개설한 강릉 대관령의 지방도 456호, 전북 장수의 소백산맥 육십령에 1927년 건설된 국도 26호, 경북 상주의 눌재와 화령재, 전북 남원의 여원재 등이다. 12곳 가운데는 상주 비재와 남원 사치재 등 해방 후 설치된 도로 5곳도 포함된다.

일제가 해방 때까지 35년간 건설한 신작로는 2만5500㎞에 이른다. 1917년에만 1만3000㎞의 도로가 개설됐다. 국토개발연구원장을 지낸 김의원 전 경원대 총장에 따르면 당시 자동차 등록대수는 114대에 불과해 도로 건설이 경제적 이익보다는 군사적 목적을 노린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도로가 남북 도로 위주인 점도 대륙침략의 요로로 활용하기 위한 의도였음을 짐작케 한다.

일제 말뚝 제거를 놓고 풍수지리설에 근거한 미신적 행동이라는 반대도 있었다. 백두대간 복원도 비슷한 논란을 부를 수 있다. 터널로 사라질 호젓한 휴게소를 그리워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일제의 난행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데는 이론이 없다. 백두대간 복원은 생태적 의미도 크다. 공사가 마무리되면 바뀐 풍경을 한번 둘러보고 싶다.

김의구 논설위원 e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