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김숙향] 뜻하지 않았던 해외선교와 결혼…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입력 2012-11-16 18:13
필리핀 빈민가 톤도 ‘교육 혁명’ 일으킨 김숙향 선교사
1997년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서 자동차로 1시간 30분쯤 떨어진 카피테 지역. 전형적인 시골 풍경이 펼쳐지는 이곳 지프니(jeepney·필리핀 주요 대중교통 수단) 정류장에 무거운 짐을 들고 우두커니 섰다.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떠나는 한국행이었다. 목사인 남편은 월급이 없다. 5년간 돈 대신 믿음으로 생활고를 견뎠다.
정류장에 온 지 1시간이 지났다.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8년 전, 선교사로 이 땅을 밟으면서 내 것을 포기한 삶을 살았다. 교수의 꿈을 버리고 필리핀 고아들을 돌봤다. 독신 계획을 접고 15년 연상, 전과 34범 재소자 출신 현지인 목사와 결혼해 개척교회 두 곳과 빈민들을 섬겼다. 그럼에도 남은 건 어린 딸 우윳값조차 마련할 수 없는 지독한 가난뿐.
‘하나님, 제 삶이 왜 이래야 하나요. 제가 얼마나 큰 죄를 졌기에…. 이런 삶을 원한 게 아닌데요.’
마닐라행 지프니를 보며 갈등하던 순간,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말을 걸었다.
‘숙향아, 네가 왜 여기에 와 있냐.’
‘물론, 선교하려고요.’
‘편안한 삶, 행복한 삶, 너만을 위한 삶을 사려면 이곳 선교사로 오지 말아야지. 왜 여기 와 있니.’
마지막 질문이 메아리처럼 마음을 울렸다.
“고난의 원인은 하나님도, 남편도 아닌 저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교만 때문에 이곳에 온 목적을 잊었다는 걸 깨달은 그는 이내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15년 전 이렇게 돌린 발걸음이 ‘쓰레기 마을 톤도의 기적’을 만들리라 누가 상상했을까.
그는 필리핀 빈민가 톤도의 ‘교육 혁명’을 일으킨 김숙향(영어명 샤론 킴·53) 선교사다. 2000년부터 남편의 고향인 톤도에 정착해 교육센터를 짓고 100명의 아이들과 교육사역을 시작했다. ‘가난을 구제하는 것은 빵이 아닌 교육이다.’ 이것을 목표로 진행된 사역은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냈다. 빈민촌 쓰레기 마을 톤도에서 일어난 기적은 김 선교사의 고난에서 시작됐다.
선교사만은
강원도 태백의 제일가는 부잣집에서 4남1녀의 둘째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큰 어려움을 모르고 컸다. 금광 3곳을 소유한 집안이 기울기 시작한 건 그가 중학생 때부터. 오빠의 과욕과 경영 미숙이 화를 불렀다. 낯모르는 이들이 집에 들어와 집안 곳곳에 빨간 딱지를 붙인 이후 그의 삶은 급격히 변한다. 사업 부도는 가장 먼저 식탁에 영향을 미쳤다. 쌀이 없어 도시락을 못 싸가는 날이 늘었다. 번번이 친구 도시락을 나눠 먹을 순 없었던 그는 화장실에서 점심시간 내내 기도했다.
‘제가 커서 뭐가 될 진 모르지만, 저처럼 배고픈 아이들과 함께 살며 돌볼 수 있게 해 주세요.’
하지만 선교사가 될 생각은 없었다. 6살 때부터 동네 교회를 다니긴 했지만 그저 친구들과 놀러 간 것뿐이었다. 고교 2학년이던 어느 날, 교회 부흥회 설교에 감동을 받은 그는 자신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 ‘뜻’을 찾으려 기도원에 들어가 6일 금식기도를 감행한다.
무엇보다 어른이 되면 뭘 해야 할지 알고 싶어 기도했다. 책을 좋아하던 그는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해 신학교수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전 재산을 정리하고 작은 식당을 운영하며 5남매 뒷바라지를 하는 엄마를 외면할 순 없었다. 진로를 놓고 6일 밤낮을 기도한 그에게 하나님은 전혀 예상치 못한 길을 제시한다.
“금식 마지막 날까지 아무리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해도 깨달음이 없는 거예요. 강대상에 올라가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는데, 당신의 기이한 뜻을 안 보여 줄 건가요’라며 울며 기도했죠. 그때 마음속에 ‘내가 널 선교사로 불렀다’란 음성에 들려요. 선교에 관심도 없던 제가 선교사라니. 그땐 그 응답을 믿지 못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기도를 다시 한다.
‘평생을 한센인 마을에서 봉사하라면 가겠습니다. 하지만 외국은 못나갑니다. 저는 영어도 못하고 선교도 몰라요. 홀로 고생하는 엄마도 돌봐야 하고요.’
이후 한동안 기도를 잊고 지냈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5년 간 회사와 은행에서 일을 했다. 조금이나마 가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신학교수의 꿈은 잊지 않았다. 다시 공부를 시작한 그는 1984년 성결대학교 기독교학과에 입학했다. 입학하면서부터 석사와 박사 학위를 염두에 두고 공부를 시작했다. 엄마 홀로 가정 경제를 이끌고 있었기에 대학교 이후 과정도 무조건 장학금이 필요했다.
다시 기도를 떠올린 건 엄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부터. 졸업을 몇 달 앞둔 87년 12월,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고 바로 기도를 한다. 엄마를 살려주시면 선교사로 나가겠다고. 하지만 엄마는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엄마는 내가 돌보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돌보시는 건데. 제가 교만했습니다. 한동안 죄책감과 허망한 마음이 밀려왔어요. 하지만 엄마의 죽음으로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무엇이든 순종해야 한다는 교훈도 얻었고요.”
그는 하나님의 뜻인 선교사의 길을 놓고 준비하기 시작한다. 선교사가 되는 길은 쉽지 않았다. 한국선교훈련원(GMTC)에서 9개월간 교육받고 선교지도 정했으나 그를 후원하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아무도 없었다. 당시 교회나 선교단체는 독신 여성선교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90년 필리핀으로 떠났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이 남자만은
‘순종만이 살 길’이란 교훈을 얻은 그는 필리핀에서도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일했다. 하고 싶었던 고아원 사역도 순탄하게 이뤄졌다. 후원자와 파송교회도 생겼고, 고아원에서 월급도 받았다. 후원금은 고아원에 모두 헌금하고 자신은 91년 당시 월급 5000페소(한화 14만원)를 받았지만 행복했다. 40일 금식기도가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김 선교사는 필리핀에 도착하자마자 3가지를 기도했다. 선교지로 필리핀이 맞고, 이곳 고아를 돌볼 수 있다면, 고아를 위해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는 내용이었다.
안온하던 그의 삶에 예상치 못한 변수가 끼어든다. 함께 일하던 동료로부터 그를 아내로 점찍고 기도하고 있는 필리핀 목사가 있다는 것이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한 달 뒤, 그 목사가 시간을 정해 하루 5번씩 그와의 결혼을 위해 기도한다는 말을 듣고 나선 두려워졌다.
김 선교사도 자신을 연모하는 이를 알고 있었다. 목사의 이름은 호세 발라이스. 그보다 15살 더 많았다. 고아로 자라 마약, 폭행 등 수많은 중범죄를 저질러 16살에 교도소에 들어간 그는 전과 34범으로 26년간 옥살이를 했다. 극악무도한 그를 변화시킨 건 성경구절이었다. 교도소 성경공부시간 우연히 접한 ‘죄인 구원’이란 단어에 그는 울음이 터졌다. 태어날 때 빼고는 단 한번도 운 적 없는 거친 삶이었다. 그 단어는 34범 전과자를 모범수로, 출소 후에는 목사로 만들었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였던지 미국 유명 기독교 방송국에서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Three who dare(세 명의 회심자들)’을 만든다.
하지만 김 선교사는 그를 남편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발라이스 목사는 그의 환심을 사려 그에게 꽃다발을 전하고 고아원 아이들에게 선물을 사왔다. 주변에선 그 목사가 결혼을 놓고 40일 금식기도에 나섰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그럴수록 그는 ‘이게 하나님의 뜻인가’ 싶어 무서워졌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경험상 순종해야 불행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3일간 이 문제를 놓고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 중 하나님이 그에게 준 말씀은 ‘사랑엔 두려움이 없고…(요한1서 4:18)’였다.
“이후에도 하나님께서 ‘이 사람이 남편’이란 증거를 많이 보여주셨어요. 하지만 따가운 시선을 극복하고 그와 국제결혼을 할 자신이 없었어요. 외모나 나이, 과거만 볼 때 제가 그를 사랑할 수 있다는 확신도 없었고요.”
하지만 그는 다시 한번 순종의 길을 택했다. 필리핀에 온지 4년 만에 김 선교사는 93년 발라이스 목사와 부부의 연을 맺는다. ‘저 한국 여자가 미쳤다’는 소리도 들을 만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순종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개의치 않았다. 김 선교사처럼 발라이스 목사 역시 기도의 사람이자 순종의 사람이었다. 목회자의 아내로 김 선교사는 고아원 사역도 내려놓고 개척교회 목사인 남편의 사역을 도왔다.
고난 속에서 피어난 톤도의 기적
남편은 15년간 3명의 딸과 함께 가정을 잘 돌봐준 아내의 곁을 충실히 지켰다. 그런 남편이 2008년 6월 교통사고로 그의 곁을 떠났다. 다시금 소중한 사람을 잃은 김 선교사는 오열했다. 하지만 이내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됐다. 그는 결혼 전 했던 기도를 떠올렸다.
“성경에서 죽을병에 걸렸던 히스기야 왕이 기도로 수명을 15년 늘렸듯 저도 계획에 없던 남편이 생겼으니 15년간 그에게 헌신하겠다 했어요. 그랬더니 정말 사망일과 시간까지 맞춰 꼭 15년만 머물다 갔네요.”
그는 다시 한번 죽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감한다. 하나님의 계획엔 한 치도 오차가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남편의 고향에서 사랑하는 남편이 남기고 간 톤도의 교육사업도 그 계획 안에 있었다. 김 선교사는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기아대책과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해 그해 10월 층당 99㎡ 규모의 6층 건물을 샀다. 방과 후 교육센터로 사용되는 이 건물에선 750명의 톤도 아이들이 꿈을 키운다.
교육의 효과는 상당했다. 교육을 받은 아이 18명이 대학에 입학했다. 톤도에서 나고 자란 아이가 대학에 진학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명문 대학에 들어갔다고 이들의 꿈은 끝나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 쓰레기를 줍던 이들은 필리핀에서 각 분야를 이끌 지도자가 되기 위해 해외 유학을 간다. 또 자신 같은 아이를 후원하기 위해 고향에 돌아와 아이들을 가르친다. 교육은 부모도 바꿨다. 술과 노름으로 소일하던 부모들은 새벽에 일어나 자식을 위해 기도하고 일자리를 찾는 등 가정을 돌보기 시작했다.
선교도 결실을 맺었다. 올해로 13년을 맞는 교육센터엔 김 선교사처럼 신앙을 키우는 아이들이 점차 늘고 있다.
“빈민촌에다 우범지역인 톤도에서 유일한 외국인으로 살면서 저는 한번도 위험했던 적이 없어요. 이곳에선 이전에 남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 알거든요. 그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오늘 같은 톤도의 기적은 없었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깊고 오묘한 것이라 하는 게 아닐까요.”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