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우 칼럼] 복음의 단순성, 삶의 복합성, 신앙의 융합성
입력 2012-11-16 18:06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화두는 원래 당나라 선사 청원(靑原) 유신(惟信)에게서 나왔다. 그는 자신의 깨달음의 과정을 “수행 전에는 산을 보니 산이요(見山是山), 물을 보니 물이었다(見水是水). 수행을 하다 보니 산을 봐도 산이 아니요(見山不是山),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었다(見水不是水). 그런데 지금 보니 산은 역시 산이요(見山祇是山), 물은 역시 물이다(見水祇是水)”라고 설파하였다. 미국의 유명한 성서학자인 월터 부르그만도 신앙생활의 과정을 방향설정(orientation), 방향상실(disorientation), 방향재설정(reorientation)으로 묘사한 바가 있다.
사실 처음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옛 세계관을 헌 옷처럼 벗고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을 새 옷으로 입기 때문에 온 세상이 새 봄 맞이하듯 새롭게 보인다. 다산 정약용은 갑진년(1784)에 그의 절친한 친구인 이벽(李檗)과 함께 두물머리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내려오다가 “배 안에서 천지가 창조되는 시원이나 신체와 영혼 그리고 삶과 죽음의 이치에 관하여 들으니 놀랍고 경이로워 마치 은하수가 쏟아지는 것과 같았다”라고 고백하였다. 다산도 복음의 체험으로 자신의 세상을 완전히 새로 볼 수 있었으나 이후 서학(西學)에 물든 사람으로 배척받고 유배도 당했다. 그는 거대한 실존적 혼란을 경험했지만 결국 자신의 실학(實學)을 완성해 갈 수 있었다.
복음은 순전무구하게 단순하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던 강도조차도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구하자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구원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눅 23:42∼43). 복음을 경험할 때 우리는 갑자기 그렇게도 좋아하던 술과 담배도 끊으며 방탕하고 혼란스러운 인생을 단정하게 꾸려나간다. 마치 어둠에서 빛으로 넘어온 것 같으며 모든 짐을 내려둔 것 같다.
그러나 신앙의 연륜이 깊어져 가면서 세상도 교회도 만만하지 않고 복잡(複雜)하고 혼잡(混雜)스러운 것을 느끼며 다시 좌절하고 방황하게 된다. 이때 갑자기 ‘복음이 복음이 아니게 보이는(福音不是福音)’ 방향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이 혼돈(混沌)을 극복하지 못하여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신자들이 최근에는 급격하게 많아졌다. 사실 이 자리가 바로 목회의 자리이다. 그러나 목회자들은 복음의 단순성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욥의 친구들처럼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 피상적인 위로로 변죽만 울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복음은 단순하지만 신학은 사실 복잡하고 어렵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vere homo)이요 참 신(vere deus)이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filioque). 성경은 사람의 말이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교회는 보이는 교회(ecclesia visibilis)와 보이지 않는 교회(Church invisibilis)로 구성된다. 그래서 알곡과 쭉정이가 보이는 교회에는 늘 공존한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의인은 늘 형통하고 악인은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그 반대가 일반적인 모습이다.
참된 신앙은 이런 삶의 복합성을 이해하고 통합하여 융합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손양원 목사님처럼 인간 적대심의 최고봉인 ‘원자탄’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녹여 ‘사랑의 원자탄’을 만드는 것과 같다. 마치 거미가 온갖 벌레를 먹지만 그것들에서 아름다운 거미줄을 뽑아내어 자신의 집을 짓는 것과 같다. 복음의 능력은 혼돈이 일상이 된 현실에서 주님과 친밀한 내면적 삶을 가꾸어가면서 내 삶의 터전을 사랑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창조를 이루며 하늘의 생명력을 누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융합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복음은 다시 복음이 된다(見福音祇是福音). 이때 우리는 새로운 방향감각을 되찾고(reorientation),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주님 외에 사모할 자가 없음을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시 73:25).
(총신대 교수, 한국신학정보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