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스타벅스 커피와 진료 확인서에 얽힌 이야기

입력 2012-11-16 18:13

매주 금요일 이화여자대학교 법학관 301호에서 열리는 독회에 들어가 어깨 너머로 키케로의 ‘법률론 De Legibus’을 엿들은 지가 근 한 달이 넘어간다. 이 독회를 인도하는 사람은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의 박준석 교수이다. 지난주 박 교수는 커다란 스타벅스 커피를 갖고 와 종이컵에 부어 여러 잔을 돌리면서 커피에 얽힌 이야기로 모임을 시작했다. 그는 여느 때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이대 앞의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주문했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커피가 나오지 않자 카운터에 가서 무슨 일인가를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주문은 되었는데 실수로 커피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점원은 원한다면 환불을 해 줄 수도 있고, 아니면 주문한 미디엄 사이즈 대신 라지 사이즈의 커피를 제공할 수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법, 자신의 권리를 찾는 자만 보호

하지만 법철학자인 박 교수의 요구는 남달랐다. 그는 일단 환불을 해 달라고 하였고, 이에 덧붙여 손해배상까지 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의 요구도 놀랍지만 스타벅스 점원들의 태도도 두 번째로 놀라운 그 무엇이었다. 여느 상점 같으면 언성이 높아질 수도 있는 요청이었다. 하지만 스타벅스의 점원들은 잠깐 상의한 후에 봉투에 돈을 넣어 환불을 해 주었고, 동시에 라지 사이즈 커피로 손해배상을 해 주었다는 것이다. 국내 스타벅스 1호점다운 쿨한 환불 겸 손해배상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커피를 갖고 와서 우리에게 나누어 돌렸던 것이니, 이 나눔은 세 번째로 나를 놀라게 했다.

나라는 사람도 권리관계에 대해서 둘째라면 서러워할 만한 면도 있다. 오래 전 시간 강사 시절, 나의 아내가 진단서 발급을 위해 3만원을 낸 후 집에 와서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다.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하면서, 진단서가 무엇일까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네이버에 들어가서 진단서에 관한 논문을 몇 편 구매하여 탐독했고, 이로써 진단서에 관한 지식을 갖추게 되었다. 다음 날 아내가 치료받은 곳으로 달려가서 간호사에게 진단서를 돌려주고 3만원을 되돌려 받았다. 그러고는 의사를 만나 설득하기 시작했다.

나는 의사에게 치료를 증명하는 진료확인서를 요구했다. 의사는 갖고 있던 양식을 보여주면서 진료확인서라는 양식이 없다고 했다. 나는 의사협회에서 발행한 모든 양식은 법정양식이 아니라 임의양식에 불과하니 인쇄된 양식이 없는 것이 별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진료확인서’를 한글 프로그램으로 작성하여 프린터로 인쇄해 주면 된다고 하였다. 의사는 프린터가 고장이니 그것도 안 된다고 했다. 나는 프린터가 고장인 것도 별 문제가 안 된다고 하면서, 대신 백지 한 장을 꺼내서 내가 요구하는 대로 써 달라고 했다. 제목은 ‘진료확인서’이고, 그 아래 의사의 이름이며 의사 면허번호, 병명, 치료 내용, 날짜와 서명 등을 적도록 했다. 의사는 이렇게 마음대로 써도 되는 것이냐고 나에게 반문했다.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내가 원하는 대로 써 달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손으로 쓴 진료확인서가 완성되었다. 나는 진료확인서가 무슨 병을 언제 어떻게 치료했는가를 증명하는 영수증의 성격이니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설명하였다. 의사는 나의 논리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의사는 나에게 법대를 나왔냐고 물어보았지만, 당시 나는 법대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독일의 한 저명한 법학자는 법은 자신의 권리를 위해 애쓰는 자만을 보호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사막교부들의 금언집을 펼쳐 들면 숙연해지는 것은, 사막기독교인들의 정신 속에는 ‘권리’라는 낱말이 들어갈 틈이 없기 때문이다. 압바 겔라시오스란 자가 은 열여덟 냥의 값어치가 되는 아름다운 가죽 성경책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 수도자가 그것을 탐내었고 급기야는 훔쳤다. 겔라시오스는 도둑을 알았지만 그를 뒤쫓지 않았다. 그 수도자는 도시에 가서 은 열여섯 냥에 성경책을 살 만한 사람을 물색했다.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는 물건 값을 알아보기 위해 잠시 성경을 빌려달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성경책을 갖고 겔라시오스에게 와서 그것이 은 여섯 냥의 가치가 있는지를 물었고 원로는 그만한 가치가 나가니 그 값에 사라고 하였다. 그는 도둑질을 한 형제에게 돌아와서 겔라시오스에게 가서 물어보았더니 은 열여섯 냥은 비싸다고 하였으므로 값을 깎자고 흥정을 하였다.

정의 실현, 정의·용서를 통해야

형제는 그 사람에게 물었다. “원로가 다른 말씀은 하지 않던가요?” 그는 다른 말씀은 없었다고 했다. 그러자 형제가 말했다. “나는 그것을 더 이상 팔고 싶지 않소.” 그 형제는 자책감으로 가득 차서 원로를 찾아가 그에게 용서를 구하고 성경책을 다시 받아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원로는 성경책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형제가 그에게 말했다. “사부님이 그걸 받지 않으신다면, 제게는 평화가 없을 것입니다.” 원로가 형제에게 말했다. “그대에게 평화가 없다면 내가 다시 그걸 받아야겠네.”

사막 기독교인들의 삶을 천사들의 삶이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데에 있다. 소유권이나 권리관계에 대한 삶의 일반법칙이 통용되지 않는 특수한 장소가 사막이었던 것이다(참조 벧전 4:8). 각자의 몫을 각자가 얻도록 해 주는 정의로운 사회가 우선이다. 하지만 정의는 그 자체로 완성되지 못한다. 사랑과 용서를 통해서라야 정의는 진정으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한영신학대 역사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