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경 신작소설 ‘너 없는 그 자리’… 요즘 여성의 들끓는 속내 아낌없이 드러내

입력 2012-11-15 18:06


소설가 이혜경(52·사진)의 신작소설집 ‘너 없는 그 자리’(문학동네)는 요즘 여성들의 애환을 독백 형식으로 들려준다. 6년 만에 낸 소설집이지만 1982년 등단 이후 현대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 유수한 상을 수상한 작가답게 여성들의 들끓는 속내를 압축해 보여주는 솜씨는 한층 농익어 보인다.

“당신, 잘 지내요? 그곳은 덥다니, 가뜩이나 더위 많이 타는 당신, 쉬 지치지나 않을지 늘 걱정이에요”로 시작되는 표제작은 아프리카 케냐로 직장을 옮겼다는 남자에게 편지를 쓰는 한 여자의 독백으로 채워져 있다. 사실 남자는 케냐에 가지 않았다. 남자는 여자를 떼어놓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여자는 어느 날 남자를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목격한다. “오늘 오후 네 시 십오 분, 뱅뱅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던 재색 바바리. 당신 맞지?”

그러나 소설은 남자의 배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자와 여자는 별스런 관계도 아니었고 남자는 여자를 떼어놓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한 것이다. 문제는 여자의 심리 상태다. 여자는 남자를 운명의 상대로 생각했지만 남자가 그렇지 않은 게 문제이다. 쓰디쓴 진실은 여자가 그렇게 착각했다는 데 있다.

또 다른 수록작 ‘감히 핀 꽃’은 한 중년 여성이 미혼인 여동생에게 전화로 들려주는 독백을 통해 이른바 시월드(시집살이)의 무궁무진한 반전 스토리를 들려준다. “그분이, 아니, 우리 시아버지가 나더러 아가야, 고맙다, 이러시더라. 좀 닭살 돋더라. 내가 첫 사랑에 실패만 안했어도 사위 볼 나이 다 되지 않았니. 근데 아가야, 라니.”

결혼식 때 한 번 본 이래 새 여자를 얻어 바깥 살림을 차린 시아버지를 대범하게(?) 받아들인 통 큰 시어머니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시월드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는 새 여자가 간병인으로 들어와 한동안 시어머니와 함께 지낸다는 설정에 있다. 그 대범함이 칠십 넘긴 노인네들의 무형의 사랑이나 되는 것일까. 부부로 산다는 것이 종국엔 이런 지점까지 겪게 돼야 한다면 인생은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이혜경은 모순투성이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주변 사람들의 가면을 차분하게 벗겨낸다. 이혜경의 소설엔 속고 속이는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일종의 가면극 같은 시대상이 투영돼 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