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차피득 (8) 은인은 첫 직장을, 일터는 삶의 새 지평을 열고

입력 2012-11-15 18:05


내 인생에 있어 은인이라 할 수 있는 양정석 사장님은 아버지의 미국 대학 동창 정남수 목사의 뒤를 이어 소복호텔을 운영하고 있었다. 양 사장님은 호텔 외에도 김택진이라는 분과 함께 일본에서 화학약품용 원료를 수입하는 동원무역이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계셨다. 1955년 나는 그 회사의 경리 보조원으로 들어가게 됐다.

당시 내 학력이라고 해봐야 중졸에 불과했다. 해방 이후 전쟁의 혼란 속에서 학업을 잇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 나에게 회계, 부기, 주산은 모든 것이 새롭고 어색한 것이었다. 많은 수모를 당했지만 열심히 배웠다. 그럼에도 실력은 한참 모자랐다.

사장실에서 나를 호출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 주저앉는 느낌을 받았다. 꼭 “집에 가서 쉬다가 내가 다시 부를 때 오너라”라고 말할 것만 같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일했다. ‘하루 빨리 경리업무에 익숙해져서 이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되겠다!’ 동원무역에서 쫓겨나면 죽는다는 각오로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러자 점점 일에 자신감이 붙었고 직장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1958년 우리 회사는 합동도서라는 인쇄회사를 인수했다. 명동 미도파백화점 건너편에 위치해 있던 이 회사는 산업은행으로부터 거액의 달러를 융자받아 독일제 윤전기 등 각종 최신형 인쇄시설을 갖춘 국내 최대의 인쇄 업체였다. 그런데 너무 과욕을 부리다 부도를 냈고 부채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인수 당시 계약서에는 부채가 1억2000만원이었지만 조사를 해보니 부채총액이 두 배를 넘었다. 채권자 120명은 동원무역에 찾아와 회사를 인수했으니 대신 돈을 갚으라며 아우성이었다. 그때 사장님을 대신해 내가 이 일을 맡게 됐다. 채권자를 일일이 만나 60%의 부채를 탕감해 줄 것을 간곡히 설득했다. 아주 얌전한 채권자도 있었지만 회사가 있던 그곳이 달러 골목인 만큼 아주 악질적인 사람도 수두룩했다.

“내 돈 내놔!” “채권자 여러분, 저 이 일을 목숨 걸고 하고 있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나는 꼭 이 문제를 해결해서 그동안 사장님께 진 신세를 갚고 싶었다. 정말 목숨 걸고 일을 하니 상대도 하나둘씩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 만에 95%의 부채를 해결했다. 우여곡절 끝에 채권문제는 해결했지만 이번엔 부채규모를 속였던 전 사장이 주식 양도 과정에 하자가 있었다며 소송을 걸어왔다. 적반하장으로 사기를 치고 회사를 되찾으려는 속셈이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법조계에 아는 사람이 많아 절대 만만치 않았다. 이 재판은 7년을 끌었다. 그 당시 나는 경리사무를 보는 월급쟁이였지만 사장님을 보필해 재판 업무를 도맡았다. 장기간 법정에 서는 것은 초조하고 불안한 일이었다. 정말 지루한 싸움이었다.

안타깝게도 양 사장님은 기나긴 소송에 지치셨는지 간경화를 앓게 됐고 그만 일찍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분은 큰 사업을 하고 돈이 많음에도 절대 돈을 헛되게 쓰지 않고 약속을 철저히 지키시는 분이었다. 양 사장님으로부터 검소와 절제생활을 철저히 배웠다. 또 교회를 잘 섬기고 신뢰를 어떻게 쌓는 것인지 직접 체험했다.

회사를 구하기 위해 7년간 법원 출입을 하면서 법률 공부는 물론 회사 경영의 실무를 전체적으로 배우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이때의 경험은 내가 사업을 시작하는 데 있어 큰 힘이 됐다. 성경말씀에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이 딱 들어맞을 것 같다.

내 인생에 또 다른 은인이 있다면 아내 이계화 권사다. 아내는 19세에 예수를 믿기로 하고 불신자인 아버지에게 당당히 이야기해 승낙까지 받아낸 당찬 여인이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