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황태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입력 2012-11-15 18:29
암초에 걸렸다. 문재인과 안철수 양자 간의 후보단일화 협상이 시작된 지 일주일 만에 거친 파열음을 내기 시작했다. 단일화 방식을 논의하기 위한 협상단의 상견례가 있던 그 다음날 안철수 후보 측은 협상을 잠정 중단한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문재인 후보 측의 겉의 말과 속의 행동이 다르다”며 울분을 토해냈다. 한마디로 속았다는 뉘앙스가 물씬 풍긴다.
사태의 발단은 이날 오전 한 언론이 보도한 ‘안철수 양보론’이다. 안철수 후보가 다음 주가 되면 양보할 것이란 내용이다. 안철수 측에서는 문재인 측이 고도의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다고 분노했다. 여론조사에서 앞서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단일화에 합의하고 난 후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민감해질 대로 민감해진 안철수 캠프가 ‘양보론’에 폭발한 것이다.
만약 안철수 후보가 후보단일화의 틀 속에서도 자신이 거저 단일후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정말 아마추어다. 만약 안철수에게 레드카펫을 깔아줄 요량이라면 왜 문재인이 그토록 간절하게 단일화를 애걸했겠는가. 지난 4일 문재인은 안철수가 단일화 협상에 나서겠다는 약속만 해준다면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겠다고까지 했다.
안철수는 바람을 타고 여기까지 왔다. 낡고 시들고 병든 기성의 정당정치에 학을 뗀 중도·중간·무당층 국민들이 학수고대하는 메시아가 바로 안철수였다. 이해찬 민주통합당 대표가 “무소속 대통령으로는 국정운영이 불가능하다”고 하자, 안철수는 “끌려다닐 바에는 무소속 대통령이 낫다”며 “저에게는 정치혁신이 사명이 됐다”고 일갈했다.
그랬던 안철수가 찬바람이 불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시나브로 단일화의 늪으로 한 발짝씩 빨려 들어갔다. 정치가 바뀌어야 국민들의 삶이 바뀐다던 초심은 갈수록 변색됐다. 정치혁신을 부르짖던 사심 없던 모습은 사라지고, 야당과 함께 정권교체의 합창을 시작했다. 사심이 생긴 것이다. 사심에 가득한 메시아는 더 이상 대중들이 바라는 메시아가 아닌데 말이다.
대의명분은 안철수 편이었다.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겠다며 오로지 국민들만 보고 가겠다는데 누가 시비를 걸 수 있는가. 국민들이 그토록 혐오하고 믿지 못하는 정당정치를 확 뒤집어놓겠다는데 누가 반대할 것인가. 무소속 대통령이 되어 초당적·거국적으로 국정을 운영하겠다는데 누가 반기를 들 수 있나. 출발 당시의 안철수는 분명 시대정신을 제대로 읽고 있었다.
시간도 안철수 편이었다. 후보등록일이 다가올수록 급해지는 것은 민주당이었다. ‘박근혜 반대, 새누리당 집권 저지’라는 자기들만의 정권교체 논리 때문이라도 종국에는 안철수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안철수는 명분과 시간의 유리한 고지를 그냥 내주고 말았다. 더욱이 2002년 정몽준의 아픈 추억이 있는데도 무엇에 홀린 듯 그 길을 따라가고 말았다.
정당정치에 지쳐 새 정치를 바라는 시대적 여망이 안철수 바람이다. 그 주인공은 안철수 본인이 아니다. 그런데 안철수는 자신이 바람의 주인공인 줄 착각했다. 어떤 선택을 하든지 바람이 계속 불 줄 알았다. 바람은 거친 들판에서 휘몰아칠 때 힘이 있다. 그런데 안철수 바람은 스스로 단일화의 좁은 공간으로 들어와 갇혔다. 그러니 소멸 단계로 접어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안철수는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졌다. 당장은 문재인과 적당히 밀고 당기다가 슬며시 협상 테이블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아니 현재로서는 그 길 외에 달리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남는 것은 결국 안철수 또한 기성 정치인들과 한 부류라는 씁쓸함뿐일 것이다. 우리를 짓누르는 기득권과 결연히 맞서겠다던 그 안철수 바람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온 스칼렛 오하라의 마지막 독백이다.
황태순 정치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