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박병권] 분재기
입력 2012-11-15 18:28
자녀를 비롯한 가족에게 재산을 상속하거나 분배하기 위해 작성한 문서인 분재기(分財記)는 부가 어느 정도 쌓인 이후에 생겼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분재기는 고려 말 때 작성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 분재기는 남아 있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주로 노비나 토지의 상속 내용이 많이 적혀있기 때문에 작성 당시의 사회를 연구하는 데 매우 긴요한 일차 자료다.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자운서원에 전시된 신사임당 일가의 분재기가 가장 유명하다. 당시만 해도 상속에 남녀 차별이 없어 사임당은 적지 않은 재산을 물려받았음을 알 수 있다. 사임당은 이 재산으로 비교적 독립적이고 당당한 삶을 누린 것으로 보인다.
경북 문경 농암종택에 보관중인 분재기는 1715년 남편이 사망한 후 홀로 남은 박씨 부인이 2남 3녀의 자녀들에게 재산을 나눠준 문서다. 분재하게 된 경위를 먼저 적은 후, 자녀들의 출생 순으로 재산을 나눠준 것이 기록돼 있다. 문서의 끝 부분에는 재주(財主), 증인 두 사람, 직접 문서를 작성한 필집(筆執) 한 사람의 이름과 서명이 남아있다.
예나 지금이나 재산관계는 혈연관계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에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 요건을 엄격히 하고 있다. 현대판 분재기라 할 수 있는 유언도 법에 엄격하게 양식이 정해져 있다. 즉, 자필증서, 녹음, 공정증서, 비밀증서, 구수증서만 인정된다. 위조나 변조 등을 방지하고 신중하게 유언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재산 상속은 인간을 출발부터 차별한다는 이유로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렇지만 사회주의 공화국이라고 자칭하는 북한은 상속제도를 두고 있다. 북한 가족법 5장 상속 편에는 ‘공민이 사망하면 그의 재산은 배우자와 자녀, 부모에게 상속된다’는 등의 규정이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북한은 사회주의는 분명 아니고 3대가 세습한 왕조라는 평가가 맞지 싶다.
최근 재산 상속 문제로 재벌그룹의 형제가 법정을 오가며 공방을 벌이고 있는 모습은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다. 천문학적인 액수의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이전투구하는 모습이 재벌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자초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나마 형제간도 아닌 사촌 사이인데도 경영권을 잘 넘겨 칭송받는 LS 그룹 때문에 재벌의 체면은 덜 구겨졌다.
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