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 화풀이 대상으로 희생된 소크라테스… ‘아테네의 변명’

입력 2012-11-15 18:01


아테네의 변명/베터니 휴즈/옥당

기원전 399년 5월, 칠순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 섰다. 아테네 시민 3명이 그를 ‘반 아테네 활동’을 했다며 고발했다. 배심원 501명이 참여하는 재판에서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의당 무죄가 나올 줄 알았다. 처벌을 원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결과는 달랐다. 배심원 501명 중 280명이 소크라테스의 유죄를 인정했던 것이다.

당시 아테네 재판은 형량을 정하는 논의에 피고도 참여할 수 있었다. 다급해진 제자들은 “배심원을 자극하는 말만 하지 않는다면 그동안 아테네에 기여한 공로를 감안해 유배형이나 금고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를 설득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단에게 선처를 부탁하기는커녕 터무니없는 주장을 내놓았다.

“나를 올림피아 제전에서 승리한 영웅처럼 찬양하라. 아테네의 위대한 인물에게 경의를 표하듯 내게 경의를 표하라. 프리타네이온 위원들에게 기름진 식사를 대접하듯 나를 대접하라. 내가 행한 모든 선을 인정하여 국가의 비용으로 내게 공짜 저녁을 영원히 제공하라. 나는 당연히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한다.”(505쪽)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자신의 목숨을 재촉한 꼴이 됐고 결국 사형이 선고됐다. 한 달 뒤 사형 집행 전날 밤 소크라테스의 제자 크리톤이 소크라테스를 찾아와 탈옥을 권유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 제안마저 거절했다. 대신 소크라테스는 치유의 신 아스클레오피스에게 닭 한 마리 빚진 것이 있으니 꼭 갚아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24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우리가 궁금한 것은 ‘소크라테스는 왜 법정에 서게 되었으며 무엇을 잘못했기에 사형까지 당해야 했을까’ 하는 것이다. 당시 스파르타와 펠레폰네소스 전쟁을 치르고 있던 아테네는 참전 장군 알키비아데스를 신성모독 이유로 아테네로 소환했다. 그러자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로 도망가 아테네 군대의 중요 정보를 알려줬고 결국 아테네는 전쟁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전쟁의 패배는 정치적 변동으로 이어졌다. 군사정변이 두 차례 일어났다. 권력을 잡은 30명의 참주들이 아테네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던 아테네 시민들은 포악한 참주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제를 되찾았다. 그렇지만 화려했던 아테네의 전성기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게다가 스파르타에 매년 거액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소크라테스가 줄곧 아테네 정치를 비판했으니 위정자들은 패전의 화풀이 대상으로 소크라테스를 낙점했던 것이다. 요컨대 소크라테스는 기득권의 심기를 거슬렀다. 소크라테스가 사형에 처해진 가장 큰 이유는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이었고 꽉 막힌 현실을 극복해 이상(理想)으로 나아가려 했던 의지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저항을 실천했다. 강경이 옮김.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