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향의 恨으로 그린 ‘삽시간의 황홀’… 진안으로 떠나는 용담호 드라이브

입력 2012-11-14 18:26


새벽 용담호에서 물안개가 그리움처럼 피어오른다. 수초와 버드나무 수풀을 헤치고 나온 하얀 물안개가 시나브로 호수를 점령한다. 고즈넉한 수면에서 살풀이춤을 추는 물안개에 심연에 가라앉은 고향의 기억이 묻어 있다. 호수에 여명이 찾아오고 물안개가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를 무렵. 솜처럼 부푼 물안개가 산을 넘더니 만추의 진안고원을 무채색으로 단장한다.

호남평야의 지붕으로 불리는 전북 진안고원은 북한의 개마고원과 함께 한반도를 대표하는 고원으로 진안·무주·장수군에 걸쳐 있다. 해발 50m 높이의 이웃 전주보다 고도가 200∼300m나 더 높은 진안고원은 일교차가 크고 오염원이 없는 청정지역. ‘홍삼의 고장’으로 유명한 이곳에 최근 환경성질환 예방교육센터인 ‘진안 에코에듀센터’가 문을 열면서 진안은 ‘힐링의 고장’이라는 수식어를 하나 더 달게 됐다.

심신을 치유하는 진안 힐링여행은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용담호 드라이브로 시작된다. 고즈넉한 호수에서 목화솜처럼 부푼 물안개가 섬으로 변한 산봉우리를 휘감아 흐르는 모습은 선녀의 치맛자락처럼 몽환적이다. 이윽고 물안개로 만든 무대의 막이 푸른 하늘로 흡수되는 순간 용담호의 만추풍경이 황홀한 자태를 드러낸다.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넓은 호수인 용담호는 2001년 완공된 용담댐으로 만들어진 인공호수. 1만2000명이 살던 진안읍, 용담면, 안천면, 정천면, 주천면, 상전면 등 1읍 5면 68개 마을을 수몰시켜 만든 거대한 담수호로 전주권의 상수원 역할을 한다. 본래 수몰 전 용담소가 있었고 산골짜기를 구석구석 파고든 호수의 물줄기가 꿈틀거리는 용의 모습을 닮아 ‘용담호’라는 이름을 얻었다.

용담호에는 64㎞ 길이의 호반도로가 조성돼 있다. 산과 어우러진 호수의 풍경은 사계절 어느 때라도 아름답지만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만추의 새벽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환상적이다.

드라이브의 출발점은 호반도로가 시작되는 진안읍의 언건교차로. 어둠의 장막을 열고 호반도로에 진입하면 호수에 뿌리를 내린 버드나무 군락과 수초가 여명 속에서 부지런히 물안개를 만든다.

물안개는 물과 대기의 온도 차이에 의해 생기는 현상. 수면의 습도 높은 공기가 찬 공기와 만나면 기온이 떨어지면서 미세한 물방울로 응결된다. 이 물방울들이 떠오르며 빛의 산란작용에 의해 하얀 구름처럼 보이는 것이 물안개로 일교차가 큰 새벽에 주로 발생한다.

용담호 호반도로 중 물안개가 가장 환상적인 구간은 언건교차로에서 불로치터널까지 약 12㎞ 구간. 호수 폭이 적당하고 리아스식 해안처럼 산줄기의 굴곡이 심한데다 호수마을과 감나무 가로수가 물안개와 어우러져 절경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특히 월포대교와 상전면 ‘망향의 동산’에서 보는 물안개가 으뜸으로 꼽힌다. 맞은편 산에서 해가 솟을 때까지 시시각각 기기묘묘한 풍경을 연출하는 물안개 속으로 뻗은 한 줄기 호반도로가 미지의 세계로 안내하는 인연의 끈 같은 느낌이다.

햇살에 반사돼 용광로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수면에서 그물을 걷어 올리는 고깃배의 모습은 환상인지 실제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로 고즈넉하다. 용담호는 상수원보호구역으로 낚시가 금지돼 있지만 허가받은 주민들에게는 그물을 이용한 고기잡이가 허용된다. 이곳에서 낚은 싱싱한 붕어, 쏘가리, 메기 등은 용담호 주변의 음식점에서 매운탕과 찜으로 거듭난다.

호반도로는 상전면 ‘망향의 동산’을 거쳐 안천면, 용담면, 장천면에서 전망대를 만난다. 실향민들을 위로하는 뜻에서 ‘망향의 동산’으로 명명한 전망대들은 산줄기를 따라 굽이굽이 이어진 호수의 풍경을 감상하기에 좋다. 마을에 있던 공덕비, 열녀비를 비롯한 비석과 고인돌 등도 옮겨 놓아 물속에 잠긴 마을의 역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호수의 전망이 가장 뛰어난 곳은 용담호 한가운데에 위치한 용담 ‘망향의 동산’. 조선 영조 때의 정자로 마을이 수몰된 이후 이곳으로 옮겨온 태고정(太古亭)에 오르면 용담호 전경이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특히 이른 아침에는 물안개를 뚫고 우뚝 솟은 산줄기들이 다도해의 섬처럼 보인다.

상전면 구룡리와 안천면 신괴리를 연결하는 불로치터널은 용담호가 생기기 전 고갯길이었다. 한국전쟁 때 미군 장교가 북한군에 생포됐다고 해서 코큰이고개로 불렸던 불로치(不老峙)는 고개를 넘으면 늙지 않는다는 뜻을 갖고 있다. 고개를 넘기가 워낙 힘들어 이름이라도 멋있게 지어놓고 위안을 삼은 선조들의 재치가 돋보이는 고개라고나 할까. 불로치터널 입구의 도로변에서 보는 상전면의 용담호는 북유럽의 호반도시에서 보는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도종환 시인은 ‘단풍 드는 날’이라는 시에서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고 노래했다. 용담호 호반도로에 뿌리를 내린 가로수들이 그러하다. 단풍나무, 벚나무, 감나무 등 가로수들은 어느새 화려한 옷을 벗고 마지막 잎새 몇 장씩만 달고 있다.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생의 절정에 선 나목들이 물안개와 함께 연출하는 삽시간의 황홀을 감상하려면 만추의 새벽에 진안 용담호를 찾을 일이다.

진안=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