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정철훈] 김지하의 저 공식은 뭐지?
입력 2012-11-14 20:22
일이 잘 됐더라면 박근혜 후보는 지난달 27일, 강원도 원주시에서 열린 제2회 박경리문학상 시상식에 참석했을지도 모른다. 외형적 명분은 박경리문학상위원회가 발송한 초청장에 대한 응답 형식이 됐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성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던 배경엔 김중태 새누리당 국민대통합위원회 부위원장이 국민대통합위원장을 맡아달라며 김지하를 다섯 차례나 찾아간 오고초려(五顧草廬)가 가로놓여 있다.
만약 김지하가 위원장직을 수락했더라면 국민대통합이라는 새누리당의 정치적 프로파간다는 더욱 급물살을 탔을 것이다. 김지하는 이를 거절했지만 이달 초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작심한 듯 박근혜 지지를 천명했다. 정확한 멘트는 “아버지 놓아 버리고, 엄마 육영수를 따라서 너그러운 여성정치가의 길을 가겠다는 후보에게 믿음이 간다”였다.
그러자 맞바람이 불었다. 김지하의 서울대 미학과 후배인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삶의 일관성이라는 존재미학의 관점에서 볼 때, 기어이 말년을 지저분하게 장식하는 것 같아 안타깝군요”라고 비난하며 “인생은 수열이거늘… 저 공식은 대체 뭐지?”라고 힐난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그 공식이다.
사실 김지하와 박근혜가 원주에서 만나 화해의 제스처를 연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시나리오만은 아니었다. 9월 말에도 박근혜는 소설가 이외수를 찾아간 일이 있었으니 김지하와 박근혜가 시상식장에 나란히 앉아 있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닌 것이다. 더구나 단상엔 김지하를 대신할 또 다른 주역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단상에 사진으로 걸린 박경리와 김지하의 부인인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 그리고 수상자인 러시아 작가 류드밀라 울리츠카야가 그들이다. 세 사람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에서도 박근혜의 참석은 훨씬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좌파에선 박근혜를 두고 유신의 딸로 비유하지만 사실 유신이라는 시대적 고난을 배경으로 한 스토리텔링의 진짜 주인공은 박정희와 김지하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박정희의 운명은 유신 내부의 총소리로 마감되고 말았으니 시의 힘으로, 문학의 힘으로, 민중의 힘으로 꺾어보려던 김지하의 인생도 박정희의 부재로 인해 꼬이기 시작한다.
박정희의 죽음을 서대문형무소에서 전해들은 김지하는 그날의 충격을 이렇게 고백했다. “독방에서 100일 참선을 한 뒤였다. 100일 참선 마지막 날 12시에 박정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순간 내 눈 앞에 애드벌룬 3개가 떠올랐다. 각각의 애드벌룬에는 ‘인생무상’ ‘안녕히 가십시오’ ‘나도 곧 뒤따라 갑니다’란 글자가 쓰여 있었다. 그 뒤 장례식을 하면서 김수환 추기경이 낭독한 추모사의 첫마디가 기이하게도 ‘인생무상’이었다. 그 이후로 내가 박정희를 미워한 적은 없다.”
민주화 투쟁 대상으로서 오브제화된 박정희라는 언어의 부재. 그걸 겪은 시인의 상상력은 현실로의 함몰이나 현실과의 단절이라는 양극단의 사이 어디쯤으로 극대화되기 마련이다. 1970년대에 행동 제일선에 있던 김지하는 1980년대에 들어와 현실로부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는 더 포괄적인 정신적 혁명을 꿈꾸었다. 그게 후천개벽의 생명사상이다. 그 중심엔 자애로운 포용력을 가진 어머니, 위대한 ‘살림’의 능력을 가진 21세기 네오르네상스로서의 여성 리더십이 놓여 있다.
그렇더라도 21세기 여성 리더십을 현실 정치에서 찾다보니 박근혜로 귀착된다는 논리는 너무도 궁색하다. 박근혜가 여성인 것은 사실이지만 새누리당의 정치 문화는 여전히 경직된 남성 주도의 색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남북분단 문제에서 그 경직성은 두드러진다. 김지하의 여성 리더십 논리를 넓게 해석하자면 중도의 정신사 내지 중도 상생논리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생물학적인 측면에서의 여성이 아니라 너그러움과 부드러움의 포용력으로 상징되는 게 중도론이라고 할진대, 박근혜가 여성이라서 현실적 믿음이 간다는 논리라면 이 또한 모순이지 않은가. 우리가 여전히 궁금한 것은 이 점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