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차피득 (7) 25時 같은 인생… 제대후 남대문교회 신축공사도

입력 2012-11-14 18:23


제주도에서 훈련받을 때까지만 해도 서울의 노부모님은 내가 죽은 줄 알고 계셨다. 내가 1·4후퇴 피란을 갈 때 노량진역을 간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때 마침 폭격이 있었던 모양이다. 남쪽으로 가는 열차가 폭격을 당해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에 부모님은 거의 1년간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계셨다.

그러다 아들로부터 편지가 왔으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제주도 제2육군훈련소에서 1개월간 훈련을 받은 뒤 부산 동래에 있는 육군 제2보충대대로 이동했다. 여기서 일선 부대별로 자대배치를 했다.

제주도에서 고된 훈련을 받을 때는 제발 육지로 갔으면 했지만 막상 배치의 순간이 오자 모두들 자기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몰라 초초해했다. ‘나보다 열흘 먼저 징집당한 고향친구는 전방에 배치됐다가 다리에 총을 맞고 병원에 입원했대’ ‘친구 중엔 전방으로 차출당해 죽어서 돌아온 이도 있어’ 등 험악한 이야기가 오갔다.

“차피득은 사무실로 오도록.” 마침 보충부대에선 행정사병 1명을 보충해야 했고 여기에 운 좋게 내가 선발됐다. 전투 현장에 끌려가지 않고 후방에서 근무하게 됐으니 하나님께 저절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렇게 2년간 후방부대에서 공급계 일을 했다.

그러다 경기도 포천 5군단이 창설되면서 창설멤버로 차출돼 전방으로 이동하게 됐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전방은 다소 조용해졌다. 그해 겨울 신문을 보니 늙은 부모를 둔 외아들은 우선적으로 의가사 제대를 할 수 있다는 기사가 났다. 평생 군 생활만 하다가 끝내 전사할 줄만 생각했지 집에 돌아갈 것이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제대라는 단어를 보니 가슴이 설레고 흥분되기 시작했다.

서류를 만들어 의가사 제대 신청을 했다. 1개월 후 의가사 제대가 허락됐으니 1주일 후 제대 신고를 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너무 기뻐서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1954년 4월 의가사 제대를 했다.

그렇게도 그리던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났다. “아이고, 이게 웬일이냐.” “아버지, 어머니, 독자 피득이 인사 올립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노부모님을 모시고 먹고살아야 한다는 현실적 문제가 놓여 있었다. 그때부터 초초해지기 시작했다. 군고구마 장사도 했고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깡통 장사도 해봤지만 되는 일이 없었다. 모두 생명을 건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승산이 없어 보였다. 마침 남대문교회에 다니는 하 집사라는 분이 옆집에 살고 계셨는데 하루는 나에게 교회 짓는 일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했다.

“남대문교회가 새로 웅장하게 화강암으로 신축을 하는데 그곳에서 같이 일해 보는 게 어때?” “좋습니다. 뭐든지 하겠습니다.” “일이 좀 힘든데 괜찮겠어?” “저는 지금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닙니다.”

당시 미군 부대는 트럭 몇 대를 공사현장에 지원해 줬다. 트럭을 타고 한강 백사장에 가서 모래를 퍼오고 우이동 냇가에서 큼지막한 돌을 가져왔다. 말이 골재를 나르는 일이지 막노동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이 일도 공사가 끝나면서 없어지게 됐다. 지금도 서울 스퀘어빌딩 뒤편에 있는 남대문교회를 보면 그때 기초공사를 하던 일이 생각난다.

공사 일을 마치고 중앙청 옆 친구 집 근처에서 식료품 가게도 해보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지만 탐탁지 않았다. 그러다 소복호텔 주인이던 양정석 사장이 나를 불렀다. 당시 직장을 갖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와 마찬가지였다. 목포 태생으로 착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양 사장님은 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 중 한분이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