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의 시편] 행복하세요?

입력 2012-11-13 18:06


인도차이나반도에 속한 어떤 나라에 두 번째 다녀왔습니다. 주일 새벽에 돌아와야 하는 바쁘고 짧은 여정 중에도 욕심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여전히 발견했습니다. 가난한 나라가 드러내는 표정은 행복 플러스였습니다. 길거리에서 급하다고 자동차 경적 울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5000원 벌었으면 그중 3000원으로 맥주 한잔 사 마시고 1000원으로는 복권이라는 내일의 희망을, 그리고 남은 것으로는 쌀을 산답니다. 혹시 1000원 더 여유가 있다면 절에 들러 복권 당첨을 기도한다지요. 그리곤 ‘씨∼익’ 웃으며 행복하게 하루를 마무리하지요. 복권 한장 외에는 희망이 없어 보이는데 행복지수는 높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모르는 자들이지만 성경대로 사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우리는 정작 성경대로 살지 못하고 성경을 한 줄도 읽어보지 않은 자들에게서는 성경적 삶이 드러나는 아이러니를 봅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마 6:34)는 말씀을 우린 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늘 내일뿐 아니라 오늘의 염려에도 갇혀 삽니다. 그러니 행복하기 힘듭니다.

언급한 나라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린 많이 누리고 있습니다. 저축도 하고 연금도 들고 아프면 병원 가는 것도 어렵지 않고, 그것도 정보력과 인맥을 총동원하여 좋은 병원, 좋은 의사 골라가고, 주말이면 해외여행, 골프여행 등 스포츠레저 문화도 발달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입버릇처럼 늘 어렵다고 말하며 죽겠는다는 소리를 달고 삽니다.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초고속 영상 같은데 주름진 모습만 클로즈업됩니다. 빈곤국들에서 행복지수가 의외로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어진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몸에 밴 것은 아닐까요. 교만할 수도 또 걱정할 필요도 없는 일상이 그들을 낙관적으로 만든 것은 아닐까요.

우리도 그들처럼 가난했었는데 어떻게 지금의 나라를 이룬 것일까요. 우리도 만족하고 주어진 상황에 길들여졌다면 행복하긴 한데 누군가는 측은하게 바라봤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삶을 변화시키고 더 좋은 내일을 가꾸는 적당한 긴장과 함께, 주어진 것을 기뻐하고 만족하며 옆 사람과의 적절한 나눔을 구체화하면서 행복할 수 있는 이 중용의 길은 없는 것일까요. 무조건 감사하거나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도 그것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주어진 것을 수용하고 그것에 담긴 뜻을 찾는 통찰력, 오늘을 딛고 더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내일을 만들기 위한 건강함 몸부림, 내가 왜 열정적으로 살아야 하는지가 분명한 삶이라면, 만족과 감사 그리고 내일에 대한 기대도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지 않을까요?

<산정현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