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차피득 (6) “공산군을 막자” 학도병 모집에 무작정 입대
입력 2012-11-13 18:08
1951년 3월 대구에서 학도병 모집광고를 보고 겁도 없이 결단을 내렸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작정 입대신청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날로 고생길이 시작됐다.
소집장소에 가보니 교복차림의 학생들이 다수 대기하고 있었다. 입대하고 보니 내가 지원한 것은 정식군인이 아닌 제2 국민병이었다. 군복도 지급하지 않고 제식훈련만 가르치고 필요할 때 현역으로 입영시키는 그런 과정이었다. 훈련병용으로 지급된 총 한 자루 없이 제식훈련만 했다. 식사라고 해봐야 주먹밥에 소금 조금이 전부였다. 잠자리는 지푸라기를 깔고 가마니를 덮고 자야 했는데 밤에는 추위를 이기고자 서로 껴안고 자기도 했다. 그야말로 오합지졸의 집단이었다.
‘이건 군대가 아니라 무슨 포로수용소 같다. 아, 속아서 들어오긴 했지만 나갈 방법도 없고…. 그래, 내가 자진입대 하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잡혀 들어왔을 거야.’ 한국전쟁 당시 길거리에 젊은이가 있으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군대로 잡아가던 시절이었다. 나는 현실에 순응하기로 했다.
가장 큰 문제는 먹는 문제였다. 모두들 굶주림에 허덕였다. 훈련 중 잠깐 쉬는 시간엔 다들 먹는 타령을 했다. 통닭 이야기, 돼지를 통째로 잡은 이야기 등등.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군복과 총이 지급되는 정식 군인이 하루속히 되기만을 기대했다. 군인이 되면 전쟁터에서 죽는 줄도 모르고 어서 빨리 군복을 입고 밥을 먹고 싶다는 마음만 앞섰다.
우리는 훈련을 받으며 남쪽으로 이동했는데 대구에서 구미로 도보행군을 했다. 식량이 없으니 민가에서 밥을 얻어먹었다. 공산당을 막기 위해 싸우는 군인에게 이 정도의 수고는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들르는 곳마다 후한 대접을 해줬다.
부대는 부산으로 가려다 상부의 지시로 마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당시에 병에 걸리면 속수무책이었다. 열병이 유행했는데 약이 있을 리 만무했다. 미군 담요에 둘둘 말려서 들것에 실려 나오는 시체가 매일 있을 정도로 열병이 심각했다. 하지만 나는 감기 한번 걸리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외아들을 위해 드린 간곡한 기도를 들어주신 덕분이라 생각했다.
‘내가 없어지면 두 노인을 누가 섬기겠나. 결국 늙은 거지가 돼 길거리를 배회하게 될 텐데.’ 이런 생각을 하면 온몸이 오싹해지곤 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5개월간의 제2 국민병 생활을 마치고 제주도 제2육군훈련소로 간다는 지시가 떨어졌다. 5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5년처럼 느껴진, 정말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하나님은 그 고통 속에서 나를 지켜주셨다. 육군 제2훈련소는 제주 남쪽 모슬포에 있었다. 훈련소가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아 늘 작업을 해야 했다. 훈련을 받고 와서도 쉬지 못하고 작업을 했다. 식량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병사들은 이곳을 ‘몹쓸포’라고 불렀다. 나는 배가 고플 때면 허리춤에 숨겨뒀던 돈을 꺼내서 부대 철조망에 접근한 떡장수한테 몰래 떡을 사먹었다.
나에게 배정된 주특기는 81㎜ 박격포였다. 무거운 포를 어깨에 메고 뛰어다녔다. 하루에 수십 발을 쐈는데 그 소리가 정말 요란했다. 조교가 미리 귀 보호를 해야 한다고 알려줬어야 했지만 그런 말은 듣지도 못했다. 하루 종일 포를 쏘아대고 저녁에 내무반으로 돌아오니 귀에서 벌떼처럼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말이 들리지 않았다. 부대 병원에 가니 고막에 이상이 생겼다고 했다. 별다른 조치도 해주지 않았다. 그날로 왼쪽 청력은 제 기능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그 사건의 여파로 지금도 왼쪽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드디어 1개월간의 고된 훈련 끝에 육지로 나오게 됐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