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지형은] 설교의 ‘정치성’

입력 2012-11-13 19:47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예배이며, 예배의 심장은 말씀이다. 예배는 십자가의 복음을 현재진행형으로 반추하고 고백하며 역사와 사회의 현장에서 살아내며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이 사람들 삶으로 이어지는 것,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다.

하나님 말씀의 대언이 설교인데 이를 통해 하나님 뜻이 예배자에게 임한다. 성령이 말씀을 깨닫게 하며 말씀을 살아내겠다고 결단하게 한다. 예배 후에 이어지는 일상 곧 ‘삶의 예배’에서 말씀을 살아내면서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이 세상에서 작동한다. 거룩한 영의 운동으로 ‘지금, 여기, 우리’ 삶에 같이 계시는 하나님을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된다.

설교와 정치, 이 주제는 교회 역사에서 아주 오래된 문제다. 전통적 용어로 하면 ‘왕좌와 제단(Thron und Altar)’이다. 다른 말로 ‘교회와 국가’ ‘신앙과 정치’로 표현할 수 있다. 대선이 코앞이고, 기독교 교계에서 이런저런 모양으로 대선에 관여하고 있다. 어느 집단에서는 대선 중립을 선언하기도 했다. 설교와 정치는 어떤 관계인가.

특정 후보 지지는 적절치 않아

정치를 넓게 정의할 수도 있고 좁게 정의할 수도 있다. 가장 넓게 보면 사람이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일이 정치다. ‘인간은 정치적 존재’라는 말이 이런 뜻이다. 사람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구체적으로 논의하면서 ‘정치적인 능력’을 들기도 하는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답은 아주 간단하다. 설교의 정치성은 논의할 필요도 없다. 설교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고 정치적이어야 마땅하다.

정치를 조금 좁게 정의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어느 사회든 혈연, 지연, 학연, 계층, 이해관계, 특정한 사안 등에 따라서 집단이 구성된다. 각 집단과 그 집단의 입장은 그 자체로 선과 악으로 가를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선이고 사회복지적인 경제정책이 악이라고 할 수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의약분업, 비정규직 문제 등도 그렇다. 설교는 이런 상황에서 어느 편에 서면 안 된다. 어느 주장과 입장을 관철시키는 것이 설교의 최종 목적이 되면 설교는 본래의 자리를 잃어버린다.

정치를 가장 좁게 보자. 정치라는 말은 입법, 사법, 행정에서도 보통 입법 분야를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국회의원 직과 정당의 활동이다. 여기에서는 현실적으로 온갖 수단방법이 다 동원된다. 정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주로 이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설교는 편들면 안 된다. 대선 후보들의 공약과 연관해 집단의 이해관계가 다르다. 우리 현실을 공정하게 보면서 어느 집단의 입장이 그중 더 바른가를 판단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설교에서 구체적인 문제를 다루면서 특정 후보를 지지한다면 적절하지 못하다.

그러나 설교가 구체적 정치 사안에 대해 분명하고 강하게 말해야 할 때도 있다. 선과 악이 분명할 때다. 본 회퍼 목사가 히틀러에게 저항한 경우다. 시리아의 시민 학살, 북한의 인권 탄압, 유신 정권의 비인간적 압제 등이 그런 예다. 이런 상황에서는 두 가지가 중요하다. 성경의 가르침과 인륜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특별계시며, 인륜은 하

나님이 사람의 마음에 심어놓으신 일반계시다.

善惡 분명할 땐 강하게 말해야

어느 사회에서 공분(公憤)이 커지면 폭동도 일어나고 혁명도 일어난다. 사회 변혁이 발생한다. 인륜이 짓밟히는 데 대한 공적인 분노가 그 힘이다. 공분이 일어나는데도 강단이 잠잠하면 교회는 교회가 아니며 설교는 설교가 아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표현대로 ‘짖지 못하는 개’가 된다.

설교, 결코 쉽지 않다. 그저 30분 정도 길이로 듣는 사람 귀를 즐겁게 하는 매끄러운 상품 하나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와 교회 현실에서 설교하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지형은 성락성결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