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차피득 (5) 北進 미군을 따라 고향근처 평북 박천까지…

입력 2012-11-12 18:03

미군 부대에서 목욕물을 나르는 일 외에도 구두통을 갖고 들어가 내무반에 있는 군화를 닦았다. 미군으로부터 받은 팁과 초콜릿 군복 사탕 등 물품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것을 차곡차곡 모아 아버지께 갖다드렸다. 아버지는 내가 가져온 물품을 남대문시장에 나가 팔아 쌀과 생필품을 구해오셨다.

하우스보이 일은 미 2사단 기갑부대에서 시작됐다. 9월 서울수복이후 연합군은 공산군을 북쪽으로 밀어냈다. “우리 부대는 북쪽으로 간다. 곧바로 출발 준비를 하도록!” 부모님께 북으로 간다는 말씀도 못 드리고 북쪽으로 향했다. 문산 개성을 지나 평양까지 갔다. 그렇게 평북 박천까지 올라갔다. 박천은 나의 고향 선천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아, 이제 고향땅을 밟는구나. 조금만 있으면 전쟁도 끝날 것이다.’

1950년 11월이었던 것 같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굉장히 추운 날씨였다. 미군은 주로 땅을 파고 매복을 했다. 그들은 꽝꽝 언 땅을 파기 싫어 나에게 초콜릿을 주며 대신 파달라고 했다. 초콜릿을 받아먹는 재미에 땅을 파는 일을 시작했지만 콘크리트처럼 단단해진 땅 1m를 파낸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12월쯤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를 하면서 서울에 다시 왔다. 당시 흑석동에 부대가 포진하고 있었는데 미군에 양해를 구하고 소복호텔로 향했다. 대형 미군 가방 3개에 그동안 벌어놓은 돈과 물품을 가득 담았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소복호텔 지하에 그대로 머물고 계셨다.

“어머니, 저 왔습니다. 북쪽 고향 근처까지 갔다가 다시 내려왔습니다.” “아이고, 피득아 살아있었구나.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세 달 넘게 연락이 안 돼 우리는 네가 죽은 줄 알았다.”

오랜 만에 부모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 하루 만에 돌아가기로 했지만 조금만 더 있자는 생각에 3일을 머물렀다. 다시 흑석동으로 돌아갔지만 부대는 이미 떠난 상태였다.

1951년 1월 4일이었다. 집에서 쉬고 있는데 인민군이 내려온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부모님은 나에게 어서 피난을 가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내가 하우스보이로 일하면서 벌었던 물품을 남대문시장에서 팔았다. 그때 돈으로 상당히 큰 금액이었는데 허리띠에다 그걸 모두 넣어주셨다.

“피득아, 피난을 가려면 돈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이 돈 모두 가져가렴.” “아니, 이걸 모두 주시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떻게 지내려고 하십니까.” “괜찮다. 우리는 어떻게라도 살 수 있다. 설마 입에 풀칠 못하겠느냐. 어서 이곳을 피해라.”

노량진에 도착하니 피난민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열차는 발 디딜 틈도 없었다. 그래서 머리를 짜낸 게 국군용 객차였다. 갖고 있던 초콜릿을 건네며 자리를 좀 달라고 했다. 그렇게 오산까지 내려왔다. 걷다가 화물차와 달구지가 있으면 얻어 탔다. 기차가 있으면 다시 타고 해서 대전까지 내려왔다. 시장에 가보니 이불 미싱 등 가재도구가 매물로 많이 나와 있었다. 쌀도 있었다. 가만히 보니 시세의 절반 가격도 안 됐다.

‘피난을 갈 때 장롱이나 미싱 같은 물건은 가져갈 수 없다. 하지만 끼니는 꼭 이어야 하기 때문에 쌀이 필요할 것이다. 피난민이 이렇게 많으니 쌀장사는 무조건 잘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갖고 있던 돈으로 쌀 10가마니를 샀다. 기관사에게 쌀 반 말을 주고 열차에 실었다. 대구까지 내려와 시장에 내놨다. 직감은 맞아떨어졌다. 피난민들이 서로 사겠다고 아우성이었다. 그렇게 피난 상황에서도 사업가적 기질은 나왔다.

3월 초 길거리를 걷다 전봇대에 붙어있는 광고에 눈이 번쩍 뜨였다. ‘학도병 모집. 입영자들은 전쟁이 끝나면 우선적으로 진학시켜준다.’ 배움에 굶주려있던 내게 정말 매력적인 소식이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