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 안녕하십니까-(3부) 정신질환 불감증, 해법과 대책] (1) 유럽의 정신건강 시스템

입력 2012-11-11 19:08


스웨덴 ‘자살 제로’ 정책 1항은 저소득층 복지 확충

2000년대 중반 스웨덴에서 발생한 자살사건의 약 20%는 상담 및 치료 도중 발생했다. 보건의료 시스템의 무능이 폭로된 뒤 스웨덴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즉각 연구에 착수한 정부와 의회는 2008년 ‘자살 제로’를 위한 9가지 원칙을 공개했다. 1항은 뜻밖에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 확충’이었다. 자살을 ‘문제 있는 개인의 고통’이 아니라 ‘고용 복지와 연계된 총체적 사회 이슈’로 이해한 것이다.

상담·치료 28일 이내에 발생한 모든 자살에 대해 조사 및 보고를 의무화한 8항 ‘막스 마리아 법’도 주목받았다. 자살을 해부하는 일은 가족과 공동체 모두에 힘든 일이었지만 스웨덴 사회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끝까지 원인을 따졌고 답을 찾았다. 인구 10만명당 14명 안팎이던 스웨덴 자살률은 2009년 12.3명, 2010년 12.1명으로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복지와 의료, 동전의 양면=수도 스톡홀름 외곽 보트쉬르카 지역에 위치한 스투르브레텐 보건소는 치과이자 안과·산부인과인 동시에 고민상담소 역할까지 겸하는 동네 사랑방이다. 크고 작은 주민의 ‘문제’들은 일단 이곳을 거쳐 간다. 의사 10명을 포함한 총 30명의 보건인력이 책임지는 주민은 1500명 안팎. 운영 예산은 전액 국고에서 지원된다.

비르지타 이바르손 소장은 “환자가 이민자이든 실직자이든, 증상이 신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어려움에 부닥친 주민들은 이곳을 찾는다”며 “대부분의 문제가 보건소 단계에서 해결되고 일부 중증 환자들은 가족 클리닉, 아동전문병원, 정신과 종합병원 등 인근 전문 기관으로 이송된다”고 설명했다.

환자는 물론 가족까지 잘 안다는 건 동네 보건소의 이점이다. 때로 신생아 정기검진을 위해 보건소를 찾은 산모의 우울증, 부모가 이혼한 10대 감기 환자에게서 자살충동이 감지되는 일도 있다. 이바르손 소장은 “오래 지켜봐왔기 때문에 의사에게 환자가 익숙하다는 건 장점”이라며 “환자들은 부모의 이혼이나 배우자와의 갈등, 여드름부터 감기까지 모든 걱정이나 증상을 이메일, 전화, 메모 등을 통해 주치의에게 전달하고 상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마음의 건강이 마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도 지적했다. 고용·주거·교육 등 사회복지 시스템의 협조 없이 마음의 병은 치유될 수 없다.

이바르손 소장은 “만약 당신이 10명의 가족과 함께 15평짜리 좁은 아파트를 나눠 쓰거나 실직으로 생계가 불안하다면 이건 주거 혹은 고용 문제인 동시에 정신건강 이슈”라며 “주거와 양육, 취업 등을 도울 수 있는 사회복지 시스템이 함께 움직여야 문제가 풀린다”고 말했다. 그래서 스웨덴에서 사회복지와 의료는 함께 움직인다. 이바르손 소장 역시 보건소 책임자 자격으로 2주에 한번씩 지역 실업사무소, 사회복지과, 국영보험국 책임자와 모임을 갖는다.

그는 “생계가 불안한 실직자의 우울증이 우울증만 치료한다고 해결되겠느냐”며 “최근 실직한 주민이 우울증을 겪는다는 사실이 포착되면 함께 모여 취업과 우울증 치료, 기타 건강상 문제나 실직기간 중 경제적 어려움을 도울 방법을 논의한다”고 설명했다.

◇‘자살 제로’로 가는 길=최근 방문한 스톡홀름 인근 솔나 지역의 ‘국립자살연구 및 정신질환예방센터(NASP)’는 2층짜리 숲 속 빨간 벽돌 건물에 교수, 연구원, 박사과정 학생 등 20명 남짓이 모인 작은 기관이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세계보건기구(WHO), 유럽연합(EU) 등이 자살 및 정신건강 이슈를 다룰 때 항상 도움을 구하는 선도적인 연구기관이다.

최근 진행하고 있는 ‘세일(SEYLE·Saving and Empowering Young Lives in Europe)’은 청소년 자살 예방을 위한 3∼4시간짜리 단기 교육 프로그램이다. 교사, 상담사, 응급실 의료진, 성직자 등 청소년을 접촉할 기회가 많은 ‘자살 수문장’에게 자살징후를 감지하고 대처하는 방안을 가르친다. 이를테면 ‘혼자 있고 싶어 한다’ 같은 자살징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관 및 전문가의 전화번호, 자살충동을 느끼는 이에게 묻거나 묻지 말아야 할 질문들에 대해 알려준다.

데이비드 타이틀먼 부교수는 “누구에게 어떤 도구를 가지고 어떻게 교육하는 것이 자살 예방을 위해 가장 효과적인지 연구하고 있다”며 “과학적 증거는 한정된 자원으로 자살 제로라는 목표에 도달하는 지름길”이라고 조언했다. 임상심리상담사이기도 한 브리타 알린 애커먼 연구원도 “당장 효과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자살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고 꾸준히 교육하는 것은 자살 제로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말했다.

스톡홀름=글·사진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