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차피득 (4) 6·25 참화 속에서도 生死를 주관하신 하나님
입력 2012-11-11 18:09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우리 가족은 피란도 못가고 우물쭈물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왔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인민군은 전쟁에만 신경 썼는지 사람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집집마다 조사할 여유는 없었던 것 같다. 평온한 분위기에서 사람들은 인민군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해 7월 16일의 일이다. 주일 영락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왔는데 남산 너머에 폭음이 대단했다. 허겁지겁 남산에 오르니 해방촌과 삼각지 등 용산 일대가 불바다가 돼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인데 전투기 수십 대가 폭격을 했다고 한다.
당시 어머니는 병석에 누워계시던 차라 피란민촌에 머물고 계셨다. 한걸음에 피란민촌으로 내달렸다. ‘저 매서운 폭격에 과연 어머니가 무사하실까.’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피란민촌의 상황은 비참했다. 팔다리가 나뒹굴고 누군가의 창자가 나무에 걸려 있었다. 미군이 앞뒤 줄을 맞춰 설치된 피란민촌 텐트를 보고 인민군 병영으로 오인하고 집중 폭격했던 것 같다. 텐트를 헤집고 들어가니 기적적으로 어머니가 숨을 쉬고 계셨다. 고막이 찢어질 정도의 굉음 속에서도 기절하지 않고 폭탄을 피해 목숨을 유지한 것이었다.
“오, 하나님.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나는 어머니를 얼싸안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아니나 다를까 집중 폭격으로 어머니가 계신 텐트 바로 앞에는 큼지막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날아와 떨어져 있었다. 1m만 가까이 계셨어도 목숨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옆 텐트에 거주하던 내 또래의 친구는 폭격으로 졸지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돼 버렸다. 그날로 우리 가족은 피란민촌 텐트를 버리고 소복호텔 지하로 살림을 옮겼다.
맥아더 장군이 지휘한 인천상륙 작전이 성공했다. 서울은 9월 28일 수복됐는데 시가전이 전개됐다. 그때 남산에 있던 소복호텔에서 중앙청과 한국은행이 불타는 광경을 보았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우리 가족이 생계를 이을 방법은 없었다. 아버지는 고령인 데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았고 어머니는 병중에 있었다. 결국 내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하루는 박은식이라는 친구가 찾아왔다.
“피득아, 서빙고 쪽에 가면 미군기지가 있는데 구두를 닦는 ‘슈샤인’을 하면 돈도 벌고 ‘쪼코렛’도 먹을 수 있대. 같이 가지 않을래?”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좋아, 가자.”
나무토막을 잘라 구두통 2개를 만들었다. 구두약과 솔도 준비했다. 부대에 도착하니 미군 헌병이 총을 메고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거지 같은 우리를 들여보낼 리 만무했다. 그날로 우리는 보초를 서는 헌병 옆에서 부대 출입을 하는 군인을 상대로 구두닦이를 시작했다. 한 사흘쯤 지났을까. 은식이는 운이 좋아 부대 하우스보이로 일하게 됐다. 그때는 부대 안에서 일하는 하우스 보이를 ‘쑈리’라 불렀다. 쑈리들은 부대 안에서 미군들과 함께 식사할 수 있는 엄청난 특권이 있었다.
철망 밖에서 미군들이 식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뷔페식당에서 줄을 서서 쟁반에 고기를 담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아, 한국 사람과 미국 사람의 생활은 정말 하늘과 땅 차이구나. 우리나라도 저렇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 하나님, 우리나라도 잘 살게 해주세요.’
며칠 후 나도 부대 안에 들어가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부대에서 일하던 쑈리 중 한 명이 나를 추천한 것이다. 영어 한마디 못했던 내가 한 일은 목욕탕에 물을 길어 채우는 것이었다. 20ℓ짜리 물통을 나르는 중노동이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