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 이순신-(19) 상벌] 충성심은 미끼에 달렸다

입력 2012-11-09 18:18


대통령 선거철이다. 각 진영마다 온갖 인물이 모여든다고 한다. 중국 고대 병법서인 ‘삼략’에서 말한 것처럼 미끼를 보고 몰려드는 것이다. 이순신도 미끼를 활용해 인재들을 모았고 열정을 태우게 했다.

첫 출전해 승리한 뒤 그는 일본군 전선에 실린 물건 중에서 쌀과 옷 등을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이유는 “적을 무찌른 뒤에는 이익이 따른다는 마음(得利之心)을 일으키게” 하려는 것이었다. 첫 전투였기에 승리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익, 특히 욕망에 초점을 두었다.

두 번째 출전했을 때는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慰激軍情)”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때는 연이은 전투로 군사들이 극도로 긴장되고 피곤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3차 출전인 한산대첩 후에는 “군사들의 심정을 감동(感動軍情)”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면서 군대라는 조직의 특수성을 고려해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부산포 해전 후 그의 오른팔이었던 정운이 전사하자 “한편으로는 의로운 혼령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도록(一警他人)” 이대원의 사당에 정운을 제사하도록 했다.

그런 점에서 이순신의 동기부여 방식은 오늘날 리더들의 미끼와는 차원이 다르다. 단순하게 부하들을 이용하거나 일시적인 실적 높이기용이 아니다. 부하들이 처한 현실을 냉철하게 관찰하고 그 상황에 따라 시의성 있는 미끼를 주었고, 최종 목표인 한마음의 군대를 만들 자발적 충성심을 끌어내는 전략적 방식이었다.

미끼를 줄 최적의 시기도 놓치지 않았다. 상(償)이 주는 동기부여의 힘을 활용하기 위해 현장에서 즉시 상을 주려고 했다. “상을 줄 시기를 미룰 수 없습니다(賞不可逾時)”라는 것이 바로 그 말이다. 또한 그는 승리와 불필요한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을 전투 목적으로 삼았다. 때문에 포상의 기준도 전투 전에 분명하게 약속했다. 관행적으로 이뤄지던 포상의 기준인 ‘적의 머리’ 대신 ‘힘써 싸운 것’을 기준으로 했다. 발상의 전환을 통해 증거물 위주의 포상정책을 근본적으로 혁신한 것이다.

그 스스로 전투에 직접 참여해 솔선수범하면서 노비에 이르기까지 전공자를 자신의 눈으로 직접 살펴 불공평한 논공행상을 방지했다. 전사한 군사들은 고향에서 장사지낼 수 있도록 하고 그 가족 생계를 책임졌다. 다른 사람에게 충성심을 얻으려면 향기로운 미끼도 중요하지만 이순신처럼 먼저 그들의 마음을 읽는 것이 우선이다.

박종평(역사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