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원죄
입력 2012-11-09 17:55
어릴 적, 시골에서 두각은 나타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노력하는 내 모습에 부모님은 큰 기대를 걸고 계셨다. 그리하여 중학교를 마칠 무렵 아버지는 과감하게 충주의 큰댁으로 나를 유학 보낼 생각을 하셨고 나는 아버지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해 광산촌인 태백을 드디어 떠났다. 고등학교를 마친 후 힘겨운 대학생활을 거쳐 졸업을 앞둔 무렵 나는 대학원에 들어가서 신학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내 결심은 아버지께 실망 또 실망 자체였다. 대학까지 보냈으면 가족의 살림살이에 보탬이 돼야지 신학대학원에 가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 아버지의 변이었고 목사는 가난하다는 것이 또 다른 이유였다. 하지만 젊음의 패기가 끓어오르는 나로서는 꿈을 포기할 수 없다며 한사코 대학원을 고집했다.
기도의 줄을 놓지 않으셨던 어머니
대학원 등록 마감 한 시간 전까지도 등록금이 없어 당황하던 나는 지인의 도움으로 은행 문이 닫히기 직전 가까스로 등록금 납입에 성공했다. 알고 보니 제2외국어 시험을 치른 대학원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등록금 마련에 적잖이 힘들어했던 나는 “수석입학인데 장학금이 없느냐”고 했더니, 학교 직원은 “다섯 명 중에 일등”일 뿐이라고 슬며시 귀띔해 오히려 머쓱해졌다. 이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아버지는 형편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신학대학원을 다니는 아들이 못마땅해 등록금을 한 번도 주지 않으셨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좀 서운했을 것이란 생각도 들지만 당시에는 내가 선택한 길이라고 여기며 아버지에 대해 어떤 섭섭한 마음도 갖지 않았다.
대학원을 마친 이후 프랑스로 가서 신학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하지만 비행기 표조차 마련할 수 없었던 나는 직장생활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몇 년간 일을 하면서 한 천만원이나 모았을까 싶던 어느 가을 신학공부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훌쩍 프랑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하다. 1년도 버티지 못할 비용을 갖고 무작정 프랑스로 갔으니 얼마나 대책 없는 무모한 행동이던가. 그런데 얼마 후 때마침 아버지께서 갑작스럽게 퇴직을 하셨고 나는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이후 7년간의 유학생활은 전적으로 어머니와 아버지의 땀과 노력으로 지탱되었다. 어머니는 식당일을 하셨고 아버지도 새로운 직장에서 일하셨다. 매달 모자라는 생활비라 할지라도 부모님은 송금에 허덕이셨다. 생활고를 겪던 아내는 누적되는 카드 빚을 감당할 수 없을 때가 되면 친정에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숨이 턱까지 차는 듯한 기간을 몇 년 거치고 학위논문을 발표한 직후 인천공항에 도착했는데 마중 나온 동생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어머니가 폐암에 걸린 지가 벌써 3개월째라는 것이다. 논문을 마무리하는 데 지장을 줄까봐 내게는 그 사실을 숨기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중학교 시절부터 너는 커서 신학자요 목사가 되라고 하시며 꿈을 불어넣어 주신 분이 어머니셨다. “신학자요 목사가 돼 기왕이면 비행기를 타고 온 세계를 누비는 사람이 되라”며 뭔지도 모르는 어린 나를 부추기셨다. 그런 마음으로 나를 뒷바라지하시며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식당 주방에서 허리가 휘어져라 일하시면서도 기도의 줄을 놓지 않으시던 어머니가 암에 걸리시다니…. 그로부터 3개월 뒤 어머니는 내가 시간강사로서 첫 강의를 시작하기 바로 전주에 만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시고야 말았다. 어머니께는 지나치게 가혹한 운명이며 내게는 일평생 죄스러운 한이 되었다.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면서 몇 권의 책을 썼다. 출간된 책을 드리면 아버지는 책으로 얼마나 수입이 되는지를 늘 물어보셨다. “수입은커녕 내 돈 들여 출판 안 하면 다행입니다”는 내 대답에 아버지는 늘 실망하셨다. 어떤 책은 몇 번이나 정독하시며 몇몇 구절은 아예 외우곤 하셨던 아버지이지만 허리디스크에 걸려가며 공부한 것에 별반 대가가 뒤따르지 않는 것을 보시고 늘 안타까워하셨다. 그러던 아버지마저 병으로 고생하시다 2주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 장례에 고모님이 오셔서 해주신 말씀에 나는 다시 한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성현아, 너 갓난아이 시절 너희 엄마가 널 두 팔로 가슴에 안고 어르면서 ‘남 박사, 남 박사’ 했었다. 넌 기억 못할 거다. 너희 엄마가 널 그렇게 키웠지. 그런데 너희 엄마의 말이 씨가 되어 네가 정말로 박사가 됐네.”
아버지의 피와 땀이 어린 희생
나는 원죄를 피상적으로 이해하곤 했지만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내 원죄는 더욱 또렷해진다. 어머니의 근원적인 격려와 말로 다 못할 희생, 아버지의 피땀 어린 노고와 성실, 내 기억 속에 간직된 두 분의 사랑은 흠과 허물로 골수까지 뒤범벅된 나의 누추한 모습을 환하게 드러내고야 만다. 사막의 철학자 에바그리오스는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마음이 원죄라고 하였다(창 3:5). 나아가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능력을 남용함으로써 원죄가 생겨났다고 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이런 이론은 내가 내 죄를 통감하게 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나는 눈물 없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생각할 수 없고, 내 잘못과 욕심을 떠올리지 않고서는 그분들의 삶을 기억해낼 수가 없으니 나의 원죄를 깨닫게 해준 분은 나의 어머니요 아버지다. 어찌 나뿐이랴 부모의 애정과 노고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은 나와 같은 심정일 것이다.
<한영신학대 역사신학 교수>